▲ 박경만 한서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

과연 인간이 기계에 밀려 만물의 2인자로 추락할 것인가. 기계의 지배를 확신할수록 이처럼 ‘인간’을 다시 발견하려는 조바심이 커간다. 고매한 존재론까진 아니더라도, 목적 아닌 수단으로 타자화될 인간성을 예견하며 그 실존적 불일치에 당혹해하는 목소리도 높다.

얼마 전엔 미국 보스턴컨설팅그룹이 자동화와 인공지능에 의해 일자리를 가장 많이 대체당할 나라로 한국을 꼽은 적도 있어 우리를 새삼 심란하게 한다.

기계가 인간의 대체재냐 보완재냐 하는 논쟁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한켠에선 인간은 늘 그 본질을 무한하게 만들어간다는 확신으로 ‘일과 사람’의 영속적 관계를 주장하는가 하면, 또 다른 일각에선 ‘인간, 너 자신을 알라’며 기계의 비교 우위를 점치는 자아비판적 성찰이 맞서고 있다.

어떤 이는 ‘인간은 비숙련 노동으로 대량 생산할 수 있는, 70kg의 가장 저렴하고 예측 불가한 만능 컴퓨터’라고 했고, 반대편에선 이런 생각들을 ‘복음적 사고’로 일축한다. 앤드루 킨 같은 이는 극단적인 첨단 자동화가 인간의 무한한 소비욕을 충족시키며, 애시당초 완전고용의 싹을 잘라버릴 것으로 단언했다.

물론 제 3자 누구도 그 미지의 시간에 안 가봐서 아직은 확언할 순 없다. 단지 인간욕구와 인간을 둘러싼 상호작용이 일자리를 둔 인간의 몫을 어느 정도 보장할지 모른다는 희망은 가져볼 수도 있다. 그런 희망대로라면, 인간의 상호작용은 필시 경제적 거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또 인간욕구는 양보다는 질이 중요한데, 이런 질좋은 욕구는 기계가 아니라 오로지 다른 인간만이 채워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면 4차산업혁명기의 자동화, 로봇, 사물인터넷 등의 틈바구니에서 그나마 ‘인간’이 작동하고, 일과 사람의 선순환이 이뤄지게 하는 문법이 어느 정도 보인다. 시장 창조형 혁신이나 노동을 둘러싼 협업에 대한 보상이 그것이다.

시장창조형 혁신은 이미 하버드의 브라이언 메추,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등이 일자리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하여 꽤 많은 담론가들의 동의를 얻고 있다.

이에 따르면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 얹듯, 이미 존재하거나 자리를 잡은 시장에 제품과 서비스를 공급하는 식으론 안 된다. 그 보단 잠재 고객 스스로도 알지 못했던 욕구를 드러내도록, 충동질하고 이에 맞는 시장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과거 우리네 흑백TV가 라디오 대신 전 국민의 안방을 점령하기 시작했고, 삼성의 저가형 선풍기를 단초로 에어컨 대중화 시대가 열린 것과도 같다. 평생 음식 저장이라곤 몰랐던 인도의 빈한한 농촌에서까지 초소형 휴대용 냉장고 ‘초투쿨(chotuKool)’이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최근의 풍경도 이와 다르지 않다.

또 하나 필요조건이 시장창조를 위한 정부의 역할이다. 아무도 가보지 않았고, 선뜻 누구도 나서길 꺼려하는 황무지 개척에 정부가 나서야 한다. 나노기술, 생명공학, 청정에너지, 신약 개발 등 완전히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돌격대이자 결사대 역할을 정부가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정부는 단순한 촉진자, 관리자로서 최소한의 방임적 규제자에 머물러야 한다는 신고전주의는 이제 유통기한이 지난 ‘고전’이 된 셈이다.

무릇 신기술이건, 산업혁명이건 그 뿌리나 모티브는 ‘과거’다. 과거의 노동이 있길래 현재의 노동과 기술이 있고, ‘수신제가’와 맞닿는 가사노동과 같은 재생산노동이 있기에 사업장의 생산노동이 원활해진다.

이를 모든 개별 직업과 노동으로 확장하면, 사회 전반의 협업 개념으로 증폭된다.

그런 논리라면 어떤 사회적, 경제적 성과도 협업으로 인해 “엄청나게 생산성이 높아진 사회에 속한 덕분에 세습한 재산”에 불과한 것이다. 안토니오 네그리가 말한 ‘사회적 공장’과도 같다. 독불장군이 있어 ‘무’에서 ‘유’를 만든 게 아니라, 모든 경제주체가 서로 연대하고 신뢰하며 문화적 코드를 공유, 전승한 결정체로 해석할 수 있다. 4차산업혁명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실제 애플은 전 세계에 750여 협력업체가 있다. 인간과 인간 빅데이터의 연결과 축적, 그로부터 인공지능의 진화로 구성한 피드백의 결과, 구글 자동번역기가 열리고, 알파고 대국 데이터, IBM ‘왓슨’, 페이스북 얼굴인식시스템 등이 출현했다. 모르긴 해도 이들 개발자들은 모두 다가올 4차산업혁명의 강력한 주체가 될 가능성이 크다.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당연히 협업의 몫에 대한 보상도 있어야 한다. 이는 혁신 과정의 낙오자를 구제하기 위한게 아니라 협업에 대한 공동체적 보상이며, 기술혁신에 기여한 모든 인류에게 주어지는 정당한 몫이다. 국내 한 경제학자가 “인공지능이 생산한 부를 n분의 1로 나누자”고 나름의 배분적 정의를 제시한 것도 그런 시각에서다.

이런 공식이 보장되면 개인들은 자신의 지식과 경험, 노동을 더 쉽게 남들과 공유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유급노동은 줄이고, 더 다양한 세상의 감각적 체험을 즐길 수도 있다.

이제 우린 유용한 선택을 해야 한다. 여유있게 시장을 창조하고, 협업에 의한 분배를 실현하며 4차산업의 도구를 인간의 노예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일자리를 빼앗기고 기계의 추종자로서 허드렛일에 아등바등할 것인가. 이는 산업시대에 만들어진 ‘일’의 계명을 언제까지 준수해야 하느냐는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며, 인간과 기계의 매트릭스를 둔 치열한 질문도 된다. 그래서 우린 인류사상 가장 치명적인 기로에 서 있다. 인간이 수단인가, 목적인가 판가름지어야 할 때가 다가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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