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경만 한서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교수.

장차 우리의 일자리를 송두리째 빼앗아갈 것으로 지목되는 ‘로봇’은 본래 ‘허드렛일을 하는 노예’란 뜻의 체코어(語)다. 어원대로라면 허드렛일을 하는 노예가 미래의 인간 대신 일자리를 위협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물음도 가능하다. 과연 우린 4차산업혁명이 본궤도에 오르면 허드렛일을 서로 차지하려고 ‘노예’와 다퉈야할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일을 초월한, 존재를 위한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자유롭고 품위있는 인간다움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인가. 자동화와 일자리의 소멸, 기계에 의한 인간이성의 대체와 같은, 세기적 전환이 점쳐지는 오늘, 그런 의문에 봉착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좀더 원색적이고 솔직한 질문을 던져볼 만 하다. 일을 왜 해야 하며,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따위의 궁극적 질문이다. 일과 임금노동이 있어야만 다양하고 의미있는 삶을 찾을 수 있는가, 생존하기 위해 일해야 하는 상황에서 탈출할 수는 없는가, ‘임금노동만이 인간성을 정의하는 활동’이란 칼 막스의 정의가 온당한가 등을 물어볼 때가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규칙적인 유급노동의 역사는 짧다. 일과 근면이라는 신교도 프로테스탄티즘의 교의가 1차 산업혁명과 겹치며 근대적 일상의 태도로 자리잡은지 불과 수 백 년이다. 유급노동의 이데올로기 또한 비정하다. 먹고사니즘에 매몰되다보니 진정 창조적이고 인본적인 활동의 가능성을 대부분 차단한다. 인간의 자율적 동기를 ‘나인 투 식스’에 가둔채, 수명 짧고 제한된 기능의 상품을 마구 찍어내고, 일정한 생산수준을 위해 생태파괴를 일삼는다. 그럼에도 유급노동 수요자들은 맹렬한 경제성장을 실업 대응책으로 쓰며, 잡다한 서비스와 쓸모없는 상품을 만드는 ‘허튼 직업’을 양산하곤 한다.

그런 ‘허튼 직업’들마저 앞으론 소멸될지 모른다. 과거 세 차례 산업혁명 고비마다 재미를 봤던, 무제한의 일자리 대량생산 시대는 이제 갔다. 저성장, 제로성장, 고용없는 성장의 와중에 일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끝없는 경제적 팽창전략은 약효가 떨어졌고, 그나마 있는 일자리의 명맥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러시안 룰렛’ 신세다.

그래서 미래를 고민하는 많은 지성들은 ‘탈(脫)노동(postwork)’을 주문한다. 이는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란 원초적 궁리에서 나온 것이며, 기술혁신을 뛰어넘는 삶의 방식에 대한 근원적 혁명을 고민한 결과다. 이들은 유급노동을 신성시하는 직업윤리 대신, 일로부터의 해방을 꿈꾼다. 그런 세상에선 기술적 실업을 애써 극복하기보단, 되레 기계에 의한 완전실업이 미덕이다. 노동자들이 임금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삶에 대한 주체적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럼 ‘인간은 놀기만 하려나’ 싶지만 그렇지 않다. 기계에 맡기는 건 노동일뿐, 모든 인간적 활동은 다시 회복된다. 로봇과 인공지능을 인간의 하인으로 부리고자 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일 뿐이다. 생존을 위한 노동이 줄어든다면 더 다양하게 인간의 잠재력을 증가시킬 인도적이고 실존적인 활동에 매진할 것이다. 고용노동 바깥에서 한층 의미있는 삶을 모색하며, 자본주의적 사익(이윤) 추구에 덜 개입하면서도 값있는 성취를 도모하는 인본주의적 삶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전제는 있다. 4차산업혁명에 의해 창출된 부(富)의 분배다. 지금처럼 노동에 기초한 분배 방식이 아니라, 부의 공정한 나눔을 실천하는 기술이 개발되어야만 일로부터의 해방이 가능하다. 그 대안 중 하나가 기본소득이다.

이에 관한 왈가왈부는 일단 미뤄두자. 다만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소비에트 강령이나, ‘임금 노동자들만 사회적 생산의 소유권이 있다’는 신자유주의자들과는 각을 세우며, “모든 시민은 모든 공유자원의 사용 이익을 나눠 가질 권리가 있다”는 공리주의적 주장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는 이념 간 진영의 논리가 아니라, 정녕 살기좋은 미래 세상의 준거틀에 대한 공동체적 논의로 승격되어야 할 대상이다.

기실 인류는 18C 러다이트(기계파괴운동) 이래 이와 비슷한 처방을 하곤 했다. 우파의 역사적 상징인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공교육, 산재보험, 국민건강보험, 노인연금 등을 최초로 만들었고, 19C 영국이 누진 소득세와 사회보장으로 산업화 과정의 충격을 넘어섰던 것도 그래서다. 기술발전의 혜택을 사회 전체에 퍼뜨림으로써 닥쳐올 더 큰 재앙을 가래 대신 호미로 막은 것이다.

갤럽 조사는 “전 세계 노동자 중 13%만이 하는 일이 좋아서 한다”고 했다. 혹자는 “자동화 기계는 노동하는 노예인데, 그것과 경쟁을 벌이자면 그 노예의 노동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꼬집었다. 그 말대로 우리가 기계 수준으로 전락하고 싶지 않다면, 기계와 경쟁하려는 노력은 중단하는게 옳지 않을까. 탈노동은 인류에게 그런 버전의 새로운 삶을 제시한다. 고된 노동일랑 로봇에 맡기고, 인간은 자유롭게 인간성에 충실한 활동을 하며 값있게 사는 체계를 제안한다.

그래서다. “로봇, 인공지능이 우리 일자리를?”이란 단편적인 조바심에 앞서, ‘우리는 대체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 건가’를 물어보는게 순서다. 활용 가능한 노동력의 일부와 기계가 일하는 덕분에 행복한 삶을 꾸릴 수 있는 ‘노동없는 미래’를 먼저 탐문해야 할 것이다. 인간역량의 재발견을 바탕으로, 인간 진보와 행복을 향한 우주적 이상도 그려봄직 하다. 물론 이 모든 게 유토피아적 희망사항으로 치부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그렇게 희망할 권리가 있다.

저작권자 © 애플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