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시선으로 본 제4차산업혁명-‘평등한 불평등’(4-3)

소외와 격차는 4차산업혁명의 가장 어두운 모습이 될 지도 모른다. 공유경제 접속에서 소외된 사람과 비표준 고용으로 연명하는 절대 다수의 긱(gig) 시티즌은 빈곤의 늪에 빠져들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극소수 애플리케이셔너, 창의적 혁신가나 투자자 등은 돈방석에 앉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의 시니컬한 독백은 쓰다. “늘 효율성 높은 자본주의라는 엔진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쓰레기더미, 그게 빈곤이며 빈곤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런 맥락이라면 4차산업혁명은 ‘혁명’은 커녕, 인간 소외와 차별을 극대화하는 역사의 반동일 뿐이다. 

그래서다. 이 즈음 능력과 경쟁지상주의에 맞서 보편적 분배, 비대칭 복지가 그런 재앙과 같은 미래의 해법으로 오르내린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교조적 사회주의는 두말할 것 없고, 노력의 결과로서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 것’만을 각자가 향유하게 하는 자본주의 강령도 과연 늘 옳은 것인가? 그런 회의에서 출발한 것이 노동과 복지의 비대칭성이며, 기본소득이다. 그 바탕엔 한 사회가 그 구성원의 평생 노동에 보상할 만한 등가물을 돈으로 환산할 수 없고, 복지체계만으론 불충분하다는 인식이 자리한다. 그 논리라면, 노동과 그 노고로부터 이득을 본 한 사회는 임금만으론 그 빚을 갚을 수 없다. 대신에 ‘받을 자격’을 굳이 따지는 대칭적 복지가 아닌, 조건없는 분배의 정의만이 그 빚을 갚을 수 있다.

기본소득은 비대칭 복지의 방법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지만, 논란 또한 뜨겁다. 특히 임금 노동자들만 사회적 생산의 결과를 나눠 가질 권리가 있다는 신자유주의자들은 무척 당혹해 한다. 이들은 기본소득이 효과적인 사회정책 개혁으로 이어질 것인가에도 회의적이다. 그러나 그런 의구심들은 궁극적으로 인간 모두의 삶이 풍요로와야 한다는 정언명령으로 수렴되어야 마땅하다. 분명한 사실은 선진문명권에선 이미 기본소득이 노동시장 시스템 밖에서 국민소득 재분배의 효율적인 방법임이 입증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미리 그 정당함이나 불가피성을 예단해선 안 될 것이다. 단지 기본이 안 된 사회를 기본을 갖춘 세상으로 바꾸고자 하는 숱한 지성과 고뇌의 산물임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한 사회의 공유자산의 수익을 공유한다는 발상도 궤를 같이 한다. 예를 들어 방송과 통신  주파수 대역이나 그로부터 사물인터넷을 실어나르는 플래폼은 분명 공유의 것이다. 장차 드론이 지배할 공중(sky), 지하, 우주, 해저 등도 마찬가지다. 이들 공유자산으로부터 기업이나 공유경제 슈퍼스타들은 막대한 이윤을 획득한다. 비대칭복지, 기본소득은 그런 것들을 공유하는데서 출발한다. “모든 시민은 모든 공유자원의 사용 이익을 나눠 가질 권리가 있고, 한 사회의 공유자원 일체가 보편적 기본소득의 근거”인 것이다. 달리 말해 모든 사람들이 한 사회의 축적된 부가가치를 나눠가질 권리를 가진 주주들이란 주장과도 맞닿는다. 

하긴 기본소득의 당위성에는 좌우 양쪽이 대체로 공감한다. 다만 그 방법과 목적에 대해선 거의 정반대라고 할 만큼 확연히 다른 스탠스를 취한다. 우파는 기본소득으로 수많은 복지급여를 단순화하고, 예산을 줄이며 관료조직을 축소하는데 의미를 두고 있다. 한 마디로 작은 정부의 수단인 것이다. 또한 부(負)의 소득세, 즉 우리네 기초생활수급제도처럼 국가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선별적 복지를 포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부의 재분배효과는 같지만, 소득이 많고 적음과 연계되어 현행 경제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고 근본적인 사회관계는 변화시키지 않는 기술적 해결책이다.
반면 좌파를 비롯한 보편주의자들은 개인소득과는 무관하게 모든 사람의 기본적인 경제적 ‘허기’를 충족시키는데 방점을 찍는다. 단순히 임금체계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복귀시키거나 편입시키는게 아니라, 그들에게 최소한의 안정된 삶을 제공하려는 시도다. 이는 기술적 실업의 사후 약방문에 그치지 않는다. 역설적이게도 기술적 실업에 선제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오히려 기술적 실업을 유도하는 기능도 한다. 그 만큼 급진적이다.

기본소득의 방법론을 둔 구체적 논의는 다음 회로 넘기기로 한다. 다만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기본소득은 자유, 영리, 사유를 철칙으로 하는 자본주의의 적이 아니요, 그 안티테제도 아니란 사실이다. 이는 오히려 공동체의 안정을 통해 자본주의의 원활한 비행을 돕는 보조날개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물론 ‘물고기를 낚는 법’을 먼저 가르치라는 우파적 소신도 옳다. 허나 인간보다 기술이 우선되는 소외의 시대엔 자기 몫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 사회적 어획물을 적절히 나눠줄 좋은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래서 부와 출생에 뿌리를 두는 인위적 귀족, 혹은 능력과 천재성에 근거한 자연적 귀족, 그 어느 것에도 속하지 못한 평민들을 위한 공존의 공간이 허락되어야 한다. 이는 불평등의 경계 너머 인간존재의 재발견이며 존중의 길에 다름 아니다. 그 중 구체적 방식의 하나가 바로 기본소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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