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시선으로 본 제4차산업혁명-‘화폐의 대전환’(6-3)

▲ 박경만 교수(한서대 문예창작학부)

또다른 시선, ‘화폐 종말론’

암호화폐 사태로부터 유발된 논쟁 너머엔 화폐의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도 숨어있다. 다시 말해 ‘화폐’란 무엇이며, ‘화폐가 꼭 있어야 하나’라는 질문이다. 그 동안 화폐와 가격은 현대 경제․사회의 ‘대동맥’임을 자부해왔다. 자본주의, 사회주의를 막론하고 생산과 소비를 연결하며,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충족시키는 매개체로서 흔들림없는 존재감을 지켜왔다. 그러나 최근엔 분위기가 좀 묘하게 바뀌고 있다. 특히 2009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엔 화폐의 대전환을 넘어 화폐의 종말을 서슴없이 확신하는 담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화폐는 모름지기 생산자로부터 소비자에게 가는 움직임을 ‘매개’하면서, 생산물의 가치를 결정한다. 부가 생산되고 분배되는 전 과정이 화폐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좌파 사변가들이 화폐의 그런 카리스마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다. 애니트라 넬슨은 ‘화폐없는 세계’를, 토마스 그레코는 ‘화폐의 종말’을, 우치다 다츠루 같은 이는 ‘증여’와 네트워크에 의한 ‘탈화폐’를 확언하고 있다. 일견 유토피아적이고, 과격하며 맹랑한 도그마로 비치기까지 한다. 허나 그 행간엔 놓쳐선 안 될 시그널이 있다. 적어도 지금의 ‘화폐’는 미래, 특히 4차산업혁명 이후 부와 가치를 제대로 실어 나르기엔 힘에 부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화폐종말론자들은 ‘서로 가지려는 인간 욕구의 와중에서 희소 자원을 분배하는 최선의 방법이 화폐’라는 자본주의적 대명제에 의문을 제기한다. 아담 뷰익은 ‘욕구는 무한하므로 희소성과 화폐는 영구적인 자연 현상과 같다’는 경제학 고전을 비웃는다. 인간 욕구가 결코 무한하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 필요한 만큼, 즉 사용가치를 충족시킬 만큼의 물건을 생산할 수만 있어도 인간 욕구가 충족될 수 있다고 해석한다. 이 대목에서 돈을 주고 구매할 준비가 된 ‘유효수요’에 맞선 ‘실제수요’가 등장한다. 즉, 사람들이 각자 필요한 만큼 욕구하는 ‘실제수요’에 따라 비화폐적 생산이 가능하다는 논리다.

국내 담론가 중에서도 ‘가치주의’를 내세워 화폐의 종언을 천명하는 이가 있다. 스스로 ‘가치주의’를 세상에 펼치려 노력한다는 철학․경제학자 박명준 같은 이는 각자가 기울인 ‘수고’(受苦), 즉 가치를 서로 맞바꾸는 개념의 ‘가상가치’를 제안했다. 이에 따르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화폐는 ‘가치’를 대신하는 ‘수단’이다. ‘가치’란 사람들이 노력해서 만들어낸, 농작물, 의복, 전기, 공산품 등등이다. ‘가상가치’는 이같은 재화나 서비스를 실물 그대로 반영하는 것으로서, 사람들 간에 가치를 맞바꿔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가상’이란 명칭과는 달리, 실제와 실물의 가치를 나눠갖게 한다는 점에서 사실상의 대안화폐다. 그 바탕엔 “자본주의의 화폐는 금본위제를 포기한 이래로 ‘가치’와 무관해졌다.”는 불신이 깔려있다.

그럼 왜 그렇게 기를 쓰며 화폐를 없애려 하나? 이 질문에 이들은 ‘인간’을 내세운다. 생산물의 가치는 인간에게 얼마나 유용하고 성능이 좋은가 하는 관점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화폐경제에선 생산물에 매겨진 화폐량, 즉 가격에 의해 그 가치가 결정되고, 생산과 분배도 오로지 화폐라는 ‘외부 힘’의 지배만 받는다고 비판한다. 전형적인 비시장주의 좌파 진영 이데올로기다. 하긴 우파 경제사상가 중에서 ‘화폐’를 걱정하는 이도 있다. 즉 무한 성장욕이 낳은 신용창조(빚 만들기)의 태생적 부작용을 경계하는 것이다. 지금의 화폐경제는 미래의 돈을 앞당겨 쓰면서 끝없이 빚을 지고, 그 돈의 출처인 ‘미래’를 무한정으로 길게 잡는다. 그런 탐욕이 화폐 가치 하락을 유도하며, 금융위기는 반복된다고 이들은 우려한다.

화폐의 미래는 우리 모두의 미래다. 인간의 실용적 욕구를 매개하는 그 무엇으로서 20세기 버전의 화폐 그 너머의 것이 초미의 관심사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탈화폐’가 될지, 아니면 물물교환에 준하는 네트워크 공유경제가 될 것인지 알기 어렵다. 단지 어떤 형태로든 화폐의 대전환이 올 것임은 분명하다. 그럴수록 진영논리를 뛰어넘는, 인간에 유익한 전환기적 고민이 절실하다. 화폐종말론을 이상주의적 허언으로만 웃어넘겨선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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