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시선으로 본 제4차산업혁명-‘순수냐 융합이냐’(7-1)

▲ 박경만교수[한서대문예창작학부]

이제는 '똘레랑스' 가 키워드다

현대인은 흔히 ‘인식의 동굴’에 갇혀 산다. 자신만의 고집스럽고 허황된 ‘이데아’를 부여잡은채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한다. 매우 협애한 ‘봄’(seeing)에 사로잡혀, ‘동굴’ 밖에 대한 상상력을 잃어버린채 절대 진리와 도덕적 순결, 교조적 순수만을 과도하게 숭배하곤 한다.

새로운 세계와의 화합을 기피하며, 차원높은 융합에 대한 상상소(素)를 스스로 태워버리기 일쑤다. 이는 정녕 4차산업혁명이 인간의 지속 가능한 복리를 꾀하고, 인간 존재의 향상을 기하는 ‘인간혁명’으로 성공하려면 필히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다. ‘순수냐, 융합이냐’-. 두 가지는 디지털 기술에 의한 인류사 네 번째 혁명에게 닥친 중요한 선택지다.

다행스럽게도 작금의 ‘혁명가’들은 나름대로 분별을 하고 있다고 할까. 물리학, 디지털, 생물학 기술을 다차원적으로 결합하는 노력을 4차산업혁명의 키워드로 내세우고 있다. 이런 노력은 관용과 융합의 결과와 통한다. 객체인 ‘타자’를 주체화하는 태도, 즉 융합의 수준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디지털 혁명의 성패가 판가름난다.

모든 산업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디지털 기술’이란 다리에 의해 상품과 서비스가 융합되며, 그로 인해 파괴적 혁신이 실현되는 것이다. 그 바탕에는 기술적 지평뿐 아니라, 인류의 문제를 포괄하며 ‘나’ 이외의 것들을 포용하는 인문적 사유가 필히 깃들어야 한다.

그래서 더욱 순수를 내세운 도덕적 근본주의는 위험하다. 이는 이 세상, 나아가선 우주적 존재에 대한 절대적 진리에 직접 도달할 수 있다는 외고집의 도덕적 확신이다. 니체의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초인’을 연상할 수도 있고, 자칫 집체주의로 흐를 수도 있는 관념론적 ‘도덕실재론’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도덕실재론은 마약과도 같다. 이 혼탁한 세상에서 어떤 환상적인(환타스마타) 궁극적 질서와 도덕적 틀이 필연코 있다는 상상. 그건 곧 많은 대중들의 뿌리깊은 열망이자, 생각만 해도 즐거운 로망이었다.

나치즘이나 파시즘도 그런 오도된 사고체계의 파편들이다. 이런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도덕적 질서에 대한 인간의 추억을 파고드는 것이 또한 순수에 대한 열망이다

인본적인 디지털 혁명에게 이는 치명적이다. 순결주의는 무엇보다 인간 경험의 복잡성, 복합성을 단순화, 일반화하는게 그 특기다. 인간 세상에 함유된 다양한 도덕률에 대한 해석의 자유를 차단하고, 조금이라도 시각을 달리한 도덕적 탐구를 이단시한다. ‘자명한 진리’만을 부여잡고 사고의 깊이와 다양함, 변화하는 본성을 거부한다.

타협과 겸손한 양허에 바탕한 기술적, 인문적 융복합에 대한 봉건적 배제를 남발하고, ‘순수하지 않은’ 의견이나 기술, 새롭고 이질적인 아이디어와 발상, 사유를 경계한다. ‘빈대’ 잡느라 초가 삼간 태울 법했던 최근 암호화폐 논란도 그것과 닮은 구석이 있다. 좀 과장한다면 ‘순수성’이 자칫 혐오로 비화하며, 이질적 가치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매력적인 악화(惡貨)로 소비된 양상이다.

순수, 그것은 기술과 인간의 다양한 해석과, 이합집산을 꾀해야 할 ‘비트’의 변성이나 디지털혁명과는 유전자부터가 다르다. 새삼 환기해보자. 4차산업혁명은 다차원적 결합을 기반으로 한 비즈니스 모델이 핵심이다.

기왕의 실물자산이 디지털 자산과 결합하고, 다양한 디지털 플랫폼이 가해지면서 파괴적 혁신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질적인 것들의 화학적 섞임, 즉 이른바 산업의 융합(industry convergence)은 필수다. 그 와중에 3차산업혁명에나 걸맞은 ‘순수한 실물’과 소프트웨어를 고집했다간 만사 도루묵이다.

전통적인 칸막이 문화와 가치사슬을 혁명적으로 해체시키고, 네트워크에 존재하던 중개자를 제거함으로써 진정한 ‘혁명’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다. 똘레랑스(Tolerance)야말로 4차산업혁명의 진정한 소스코드가 돼야 한다. 이미 인공지능이 시, 소설을 쓰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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