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시선으로 본 제4차산업혁명-‘순수냐 융합이냐’(7-5)

▲ 박경만 교수(한서대 문예창작학부)

새로운 첨단기술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시대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술은 소비자들의 끝없는 기대와 욕망을 채우지 못하고 결국 단시간 내에 폐기되곤 한다. 그 때문에 기술자본주의 한켠에선 “기술을 마주한 인간이 그 기술의 ‘소비자’가 아니라, 기술과 관계를 맺는 ‘사용자’,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는 기술철학이 진작부터 있어왔다. 흔히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라고 일컫는 것도 그 중 하나다. 곧 ‘편리함’과 ‘인간적인 세상’을 한꺼번에 취하는 ‘융합’의 실천이다. 이는 4차산업혁명기의 인공지능이나 합성생물학, 그리고 온갖 사이버 기술의 공정에도 반드시 투영되어야 할 매뉴얼이다.

적정기술은 마하트마 간디의 대영(對英) 해방운동인 스와데시 운동에서 비롯되었다지만, 1960년대 에른스트 슈마허의 ‘중간기술’ 개념에 이르러 비로소 대안문명의 담론으로 자리잡았다. 그 원리는 생산 규모, 속도, 힘을 스스로 제한하며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고 한정된 자원을 낭비하지 않는 것이다. 쉽게 말해 욕심부리지 않고, 절제하며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적정한 생산기술이다. 이는 또한 특정한 시공간에서 이뤄지는 기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평가이자, 양자 간의 융합의 결과라고 해야 정확하다. 

그런 점에서 적정기술은 ‘기술 따로 인간 따로’의 인간 소외적인 기술문명을 배격한다. 기존 기술자본주의는 “어떻게든 많이만 팔면 그만”이란 생각에 일방적이고 형이하적인 요소에만 골몰한다. 그러나 적정기술은 제품의 수명을 좌우하는 사용자들의 공감 요소, 사용하는 의미, 다양한 욕망의 형태 등 형이상적 요소를 먼저 고민한다. 저개발국 어린이들을 위한 100달러 미만의 튼튼하고 성능좋은 노트북 OLPC나, 전력 사정이 좋지않은 제3세계의 태양광 램프나 전지 충전기, 부시 펌프 등이 그런 사례다. 이는 거꾸로 선진국에도 전파되며, 새로운 생산 양식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고 적정기술이 결코 인도주의적 반경에만 머무르진 않는다. 빈곤층을 ‘자선의 대상’이 아니라 ‘고객’으로 보고, 그들에게 맞는 적정 가격의 기술을 실현하는 시장접근적 시도 역시 활발하다. 취약한 고객들을 위해 기술을 소형화하고, 저렴한 가격을 추구하며 무한 확장이 가능한 기술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는 하나의 기술을 어느 적정한 수준에서 딱 멈추게하는 것도 아니다. 기술 원천에 대해 배타적인 기왕의 기술문명과는 달리, ‘열린 기술’로서 유연하고 유동적이다. 그 행위권(actorship)을 발명가 아닌 기술 자체에 맡겨 두고, 그들에 의해 기술이 진화되고 재발명(reinvention)되는 것을 양허한다. 그래서 적정기술은 끊임없이 진화, 발전하며 지속 가능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기술적 대상과 인간, 그 둘 사이의 소통과 협동, 균형있는 관계야말로 적정기술이 추구하는 융합이다. 종전의 기술과 인간이 서로 배타적 ‘소유’의 관계였다면, 적정기술은 양자가 혼연일체로 인간 내면의 삶의 방식이 되는 ‘존재’적인 관계로 자리한다.  즉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기계 사이의 바람직한 상호 작용을 촉진하며, 기술을 사용하는 궁극적 목표를 인간의 발전에 맞춘 것이다. 

4차산업혁명을 준비하는 이 시기엔 맹목적인 기술찬양론(technophilia)이나 기술 공포증(technophobia) 모두 경계할 일이다. 대신에 이들을 뛰어넘는, 인간과 기술 사이의 성숙한 존재론적 관계를 설정해야 할 것이다. 미래의 어떠한 기술혁명도 휴머니즘을 구현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 또한 과학기술의 발전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우리 삶에 어떤 가치를 더해주는지 끝없이 질문해야 한다. 그렇다면 적정기술이야말로 적정한 미래의 시스템이며, 20C 문명에서 길어올릴 몇 안 되는 ‘융합의 미덕’이다.

저작권자 © 애플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