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시선으로 본 제4차산업혁명-‘순수냐 융합이냐’(7-5)

▲ 박경만 교수(한서대 문예창작학부).

융합문명을 가로지르는 포스트포디즘은 고지식한 충성형이 아닌 가변적 인간형을 요구한다. 고정적이고, 경직된 질서 대신 유동성이 긍정적 가치로 찬양받고, 유동성과 순발력이 우선시되는 세상, 곧 유연사회가 새로운 융합문명의 테제가 된 것이다. 그런 융합사회의 정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승전결과 닮았다. 

모더니즘이 추구했던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것, 고정된 개념화와 순수한 가치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 첫 번째 특징이 비결정성(非結晶性)이다. 이는 첨단사회의 모호함, 단속(斷續)성, 단편성(斷片性), 임의성, 반역과 곡해, 무작위, 해체, 변용 등을 포괄함으로써 최대한의 창의성과 다양성, 우연성을 우려내는 것이 미덕이다. 

또한 융합은 교학적이고 규범적인 정전(正典)의 틀을 기피한다. 즉 탈정전화(脫正典化)다.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진리, 주체, 초월성, 이성과 같은 보편적 가치들은 자못 고루한 것이 되고, 그 대신 고도의 유연한 사고, 만인의 고른 참여를 바탕으로 한 다양성의 인정이 융합사회의 정신이 된다. 

오늘날은 직선 형태의 선형적인 과정으로 추론할 수 없는 곡선의 비선형적 복잡계이나, 미래의 융합문명에선 그런 복잡계를 넘어선 상황이 펼쳐진다. 단절이나 도약, 분지(分枝), 합류, 역전 등 대수학적 해법을 적용하기 힘든 비곡선적 탈선형성(脫線形性)의 초복잡계 내지 융합계가 출현한다. 또한 획일적 가치체계에서 배제되었던 ‘차이’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고, 차이가 배제나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똘레랑스가 시대정신으로 확산될 수 있다.

그러나 장점만큼이나 역기능도 많은 것이 융합사회다. 특히 리처드 세넷의 말처럼 인간성의 파괴가 가장 큰 문제다. 모든 게 급속한 변화의 격랑 속에 휘말리므로, 안정적이고 연속적인 질서가 존립하기 어렵다. 신뢰를 바탕으로 한 지속적 인간관계가 사라지고, 눈앞의 단기적 돈벌이에 전전긍긍하며, 장기적이고 예측 가능한 전망과 삶은 실종되기 십상이다. 

산업자본주의보다 불평등은 더 심할 수도 있다. 정보를 생산하고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곧 핵심적인 사회경제적 자원이자, 개인의 절대적인 자산인 세상에서 지식과 정보에 대한 접근성, 활용 능력은 곧 부의 결정적 요소다. 그 과정에서 노마드적 삶의 유연사회에 적응하거나 살아가기 힘든 디지털 대중과, 변화를 능동적으로 주도하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슈퍼스타로 단절되고 양분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하겠다.

그래서다. 융합문명사회야말로 진정한 호혜적 융합의 마인드가 필요할 것이다. 자크 이탈리아는 창의력이나 혁신성의 상위가치로서 ‘박애’를 역설했다. 신기술을 타인에게 공여할 수 있는 사회적 증여의식과 연대의식, 세계를 수평적 네트워크로 재구성함으로써 새로운 권리 체계와 관행을 뿌리내리게 하는 지혜를 말했다. 

제러미 리프킨 역시 ‘물재(物材)의 소유보다 정신적 소속의식’과 같은 융합적 포용력을 강조했다. 다시 말해 공유된 관계, 이를 통한 상호 신뢰에 근거한 협력이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Q&A가 가능하다. 과연 문명의 주체는 누구인가. 기술을 창조하고 활용해서 궁극적 행복을 추구하는 주체는 누군가. 당연히 인간이 되어야 한다. ‘4차산업혁명’ 혹은 디지털혁명이란 이름하에 인간이 실존적으로 멸시당하는 일이 있어선 안 될 것이다. 

그래서 기술주의를 넘어서고, 기계가 인간을 도구하는 하는 트랜스휴머니즘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그건 곧 ‘인간주의’의 지배다. 주객이 제대로 된 문명 철학으로서 ‘인간주의’야말로 빛과 그늘로 점철된 융합사회를 지배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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