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시선으로 본 제4차산업혁명-‘효용보다 효율’(8-2)

박경만 교수(한서대학교 문예창작학부).
박경만 교수(한서대학교 문예창작학부).

 

[애플경제=박경만 기자] 전기자동차와 태양광의 본격적인 지평을 열어 제친 엘론 머스크는 “아이디어는 돈 벌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고 했다. 인간의 삶을 얼마나 유익하고 편리하게 만들어주는가, 그게 진짜 기업하는 이유라고 했다. 기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창의성일지라도 자칫 ‘인간’이 결여되면 기계적이고 몰가치적이며 비인간적일 수 있다. 중요한 건 모든 타자의 공감을 얻고, 그로 인해 나 또한 스스로 충일한 인격적 완성에 자족할 수 있는 창의적 실천이다. 그런 인문적 용기가 깃들어야만 무에서 유를 만들 수 있고, 난해한 과제를 풀어내며, 창조력을 뛰어넘는 통찰력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서 또 다시 효용과 효율의 구분된 실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공유경제의 현실을 보자. 아마존의 미케니컬 터크(Mechanical Turk)는 수 백 수천 명의 재능을 모아 온라인상에서 의뢰인에게 논문을 작성해주거나 외국어를 번역해주는 집단적인 디지털 도급이다. 덕분에 삶은 더욱 빠르고 편리해지며, 효용이 극대화된다. 하지만 재능 공급에 참여한 이들은 정작 그렇지 못하다. 보수는 미미하고, 클레임이라도 생기면 아예 보상을 못받는다. 이들은 그래서 평생 가난한 ‘알바’ 인생에 허덕이는 반면, 아마존은 떼돈을 번다. 여기서 우린 포스트산업자본주의의 올바른 나침반을 찾기 위해서도 인간과 물질에 관한 효용과 효율의 이항대립적 함의를 궁리해야 할 것이다. 그저 자연을 극복하고, 기계와 대결해서 승리하는 기계적 창의성이 ‘효용’의 문제라면, ‘인간’에 대한 고민의 결과를 실행으로 옮기는 노력과 용기는 ‘효율’의 미덕이다.  

맹목적인 사회적 효용의 극대화는 디지털시대의 적이다. 부와 명예, 힘…. 이것들은 누구나 희구하는 바다. 즉각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실시간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답을 주는 기능적 효용 만족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인간의 본질을 고민한 결과라야 한다. 인간 본질의 효율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는 확신이 들 때 비로소 값어치가 있다. 세종대왕이야말로 그 표본이다. 중세기는 물론, 21C에도 쉽지 않을 무한 상상력과 인문적 용기, 우주적 인간애가 그 분의 풍모였다. 기계적 효율, 곧 효용이 아닌, 인간 본연의 효율에 충실했던 것이다. 배타적 이익이나 욕망, 독점적 행복 의지가 아닌, 인간 존재에 답을 주는 효율의 극대화를 실천한 분이 바로 세종대왕이다. 

에릭 프롬은 인간성의 독립, 자유, 비판적 이성 등 능동적 존재성을 강조했다. 에크하르트는 소유가 인간과는 유리된 행동이나 의견 자체라면, 존재는 그 반대의 모습이라고 했다. 달리 말해 ‘인간’이 노동, 생산, 기술로부터 유리되고 소외된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동질화되고, 그 결과물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표현만 다를 뿐, 인간 본질의 효율과도 맞닿는 얘기다. 그렇다면 ‘인간’의 효율성, 곧 존재는 능동성을 좇고 수동성을 배제한다. ‘바쁘다 바뻐’를 외치는 현대인의 분주한 일과 일상, 그것도 대개 분주한 효용일뿐 존재로서 ‘나’와는 따로 놀기 십상이다. 실은 그 분주한 노동과 그것의 결과물로부터 ‘나’가 소외된 수동적인 효용 만족일 뿐이다.

그렇다면 효용과 같은 비존재(nonbeing) 양식을 줄이는 것, 인간 본질에 충실한 효율화가 미래 사회와 산업의 궁극적 철학이 되어야 한다. 원폭을 개발한 오펜하이머도 그 표상이다. 평생을 두고 “나는 악마”라며 그는 은둔하며 살았다. 인간에 대한 고민이 뒷받침된 처절한 존재적 고뇌와 인간 본질에 대한 자성의 결과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진정한 인문적 용기를 지닌 선인(善人)이라고 해야겠다. 하긴 알베르트 슈바이처도 “인간은 초인간적인 힘을 지닌 초인이 되었으나, 초인간적인 이성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고 한탄했다. 맞는 말이다. 초인간적인 이성, 그것이야말로 ‘인간’이다. 또한 그것에 도달하는 것이야말로 곧 인간 효율의 극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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