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과 철학은 거의 시공을 초월한 인간 삶에 대한 진리!

김부조 시인

 

며칠 전부터 출퇴근길의 역사(驛舍) 주변이 소란(?)하다. 6·13 지방선거에 출마한 후보자, 또는 그들의 지원 유세에 나선 운동원들이 외치는 구호 소리가 귀를 아프게 할 정도다. 선거 때면 되풀이되는 판박이 행사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 하였으나, 유권자의 한 사람인 나로서도 솔직히 후보자들의 면면을 잘 알지 못한다. 서울시장이나 구청장 후보 정도를 제외하면, 모두 낯선 사람 일색이다. 그나마 집으로 날아온 홍보물에서 객관적인 정보를 얻는 것을 다행으로 여길 정도다.

그 지역의 일꾼을 뽑는 선거에서 선택의 기준을 정하는 데 필요한 정보가 이쯤이고 보면 매우 걱정스러운 마음도 든다. 세상이 아무리 디지털화 되어 간다고 해도 모든 시스템을 작동시키는 주체는 곧 사람이다. 바로 이 점을 감안한다면, 단순한 판단으로 투표함으로써 빚어지는, 결과적 손해는 고스란히 그 유권자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그야말로 그 지방, 그 지역의 사정이나 특색을 낱낱이 헤아려 민초들의 어려움을 잘 해결해 줄 수 있는 적임자의 선출이 필요하다. 가장 열린 자세로 민초들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고, 때로는 그들의 눈물도 닦아 줄 수 있는 사람. 바로 그 진솔한 사람을 우리 유권자들은 그리워한다.

그러한 지방 관리의 자격을 거론할 때면, 우리는 종종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를 떠올린다. 다산은 그 책에서 지방 목민관이 갖추어야 할 자세를 구체적으로 기술해내고 있다. 어지러웠던 시대, 관리들의 횡포와 부정부패에 대해 개탄했던 그의 올곧은 정신이 그곳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하며 부국강병을 꿈꾸었던 다산은 실학자이자 개혁가였다. 그러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임금의 총애를 받다가 억울한 누명만 쓴 채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떠났다. 당시 심정이야 어찌 말로 다 나타낼 수 있었을까. 하지만 분노와 절망감을 애써 추스른 뒤 ‘오히려 공부할 시간을 얻었다’고 되뇌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리고 자신의 방에 ‘사의재(四宜齋)’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의재란 ‘네 가지를 마땅히 해야 할 방’이라는 뜻으로, ‘생각은 맑게, 용모는 엄숙하게, 움직일 때는 무겁게 움직이고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즉, 스스로를 반성하고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하나의 원칙이었다.

떠나온 곳에 대한 그리움과 아픔의 시간들. 하지만 바위에 직접 새긴 ‘정석(丁石)’이라는 글씨처럼 다산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기약 없는 유배생활. 밤낮으로 제자를 가르치고 책을 읽는 데 열중했다. 그리고 이 땅의 가장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보고 들은 것은 지방 관리의 착취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참혹한 현실이었다. 그 고통을 지켜보면서 고민도 차츰 깊어만 갔다.

그가 저술한 500여 권의 방대한 저서 속에는 다양하고 평등한 세상을 꿈꾸었던 다산의 고뇌와 희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반성, 백성들의 빈곤한 삶에 대한 슬픔, 개혁에 대한 의지가 역작들을 탄생시켰다. 다산은 자기가 살던 시대를 부패한 시대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거듭했다.

마침내 그는, 썩어 가는 세상을 이대로 놔 둘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시대를 개혁하고, 공직사회도 바꾸고, 나라의 제도도 바꾸고, 법도 바꾸고, 썩은 데를 도려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을 스스로 받들고자 했다. 마침내 그는 침침한 방에서 장장 18년의 세월 동안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1818년 다산은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그리고 강진 땅을 다시 밟진 않았지만 그 시절을 무척 그리워했다고 한다. 다산의 사상과 철학은 거의 시공을 초월한 인간 삶에 대한 진리에 가까운 내용들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지금 접해도 우리들 삶의 정서와 잘 맞아 떨어짐을 느낄 수 있다. 병든 세상은 그에게 칼을 내밀었지만 그는 칼을 돌려 백성을 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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