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시선으로 본 제4차산업혁명-‘문제는 공감이다’(9-1)

톰 크루즈가 상점 앞을 걸어갈 때 홀로그램과 광고 간판들이 속삭인다. “당신에게는 이런 물건이 꼭 필요하니 어서 사라”고. SF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최근 등장한 ‘디지털 사이니지’의 첨단 버전을 진작에 선보인 바 있다. 이제 인간 ‘삐끼’는 필요없다.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으로 무장한 옥외사인들이 행인들을 검색하며, 저마다를 위한 맞춤형 상품을 권하는 호객행위를 하는 시대가 멀지 않았다. 시스코 회장 존 체임버스 같은 이는 그래서 “인간과 공감할 능력을 갖춘 사교적인 로봇이 등장할 것”이라고 했다. 수긍할 만한 얘기다. 허나 그의 말 가운데 공감이 안 가는 단어가 하나 있다. 바로 ‘공감할 능력’이란 표현이다.

과연 인간의 소비욕을 적확(的確)하게 읽어내는 로봇의 체크리스트 능력에 ‘공감’(empathy)이란 관형어를 갖다 붙일 수 있을까. 하긴 4차산업혁명 숭배자들은 장차 인간성의 세계를 ‘로봇자치(robot autonomy)세계’가 아예 대체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자율성은 없고, 그저 정해진 지시만 따르는 로봇 기기(robot appliance)가 아니라, 그 이상의 로봇 행위자(robot agent)들이 움직이는 세상이 그것이다. 로봇 행위자는 스스로 목표를 세우고 결정을 하며 인간성을 지닌 ‘사람’들을 설득하는 로봇이다. 그 지경이 되면, 사실상 미래 기술자본주의의 주인은 사람이 아닌 로봇(행위자)이 된다.

그렇다고 이걸 두고 세상에 ‘공감하는 로봇’이라고 할 순 없다. 또한 그 배후의 설계자들이 기계와 로봇을 통해 타인과 공감하고 있다고 할 수도 없다. 정녕 공감이란 타인의 감정(pathy)의 내면으로 들어가는(em) 것이다. ‘상대방과 공감해야지~’라는 작위의 인지적 공감 뿐 아니라, 육화(肉化)된 공감까지 곁들여져야 한다. 즉 타인의 눈물과 환희, 고통과 기쁨, 분노에 즉흥적이고 반사적으로 ‘나’의 감정이 반응해야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 정서적 공감능력이다. 이 순간 혹여 기계 설계자들이 흉내낼 수도 있는, 인간의 이성적 사고나 ‘의식’은 끼어들 여지가 없다. 제레미 리프킨 말마따나 ‘이성의 시대는 가고, 공감의 시대가 온다’고나 할까. 애초 공감이란 기계의 알고리즘이 흉내낼 수 있는 ‘이성’을 뛰어넘는 근원적인 인간 능력이다. 

그 ‘능력’은 곧 집단 내지 사회적 지성이라고 해야겠다. 사회적 지성은 모든 종들을 압도하며 인간이 생존해온 중요한 요건이 되어왔다. 그 동안 ‘공감’은 사회와 집단이 환경이나 외부로부터의 위험을 탐지할 임무를 서로 분담하게 했다. ‘경쟁적이고 대립적이기보단, 무리 안에서도 가장 협동심이 뛰어나고 유연한 인간이 인류 가운데 가장 성공적으로 번식해왔다’는 문화인류학적 증언도 이를 뒷받침한다. 초미분적 변화가 무쌍할 디지털혁명기엔 특히 그렇다. 공동체나 집단, 그리고 생산 시스템의 지속적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환경적 위험 요소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공감능력의 공유다. 

그래서 공감능력은 미래의 가장 유효한 대물림 유전자다. 기술만능의 쓰나미 앞에서 그나마 인간다운 세상이 되려면 너나없이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고, 상대가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십분 알아내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그리곤 그 생각과 느낌에 대해 민낯의 적절한 감정으로 공명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비약하면 4차산업혁명기의 사회 집단이 성공적인 진화를 거듭하기 위해서도 공감능력은 필수다. 인지적, 정서적으로 ‘나 아닌 것들’과 조응(照應, correspondence)함으로써 사회적 행위들이 잘 조율되고, 인간 친화의 코이노니아적 기술문명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다. 기술문명이 만개할수록 진정한 공감의 세계, 그 복잡한 반의식적 메트릭스를 사모하고 내면화해야 하지 않을까. 테크노피아가 아닌 인간만능의 유토피아를 위해서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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