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연일 이어지는 찜통더위로 한반도가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여름 낮이면 반가운 친구처럼 찾아오던 ‘소나기’도 자취를 감춘 지 이미 오래다. 날씨 탓인가? 도심을 오가는 사람들도 뭔가 마땅치 않은, 메마른 표정들이다. 촉촉이 젖어든 정서로 시라도 한 줄 읊어 보고 싶은 마음도 이미 온데간데없다. 모든 것이 증발해 버린 듯한 실종의 시간이 뜨겁게 이어지고 있다. 

바로 이러한 때, 그 삭막함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휴식의 시간일 것이다. 끊임없이 달려오기만 했으므로 과부하가 걸릴 시점이다. 옆을 둘러 볼 여유도 없었으므로 조급함이 절정에 치달았을 것이다. 이러한 때, 그 해답은 바로 ‘휴식’이다. 구태여 ‘여름휴가’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지금 휴식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시점에 닿아 있다.

날마다 거듭되는 일상에서, 마음이 초조하고 산만해지면 하던 일을 바로 멈추고 휴식해야 한다. 초조함을 또 다른 초조함으로 대응하려 애쓰면 마음이 더욱 힘들어진다. 우리의 마음은 자기 멋대로 명령할 때보다 차분히 지시할 때 더욱 잘 반응한다고 한다.

만약 자동차가 멈춤 없이 계속 달리기만 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어느 구간까지는 잘 달려가겠지만 결국은 기름이 바닥나 그만 멈춰 서 버리고 말 것이다. 달려오는 도중에 잠시 멈춰 기름을 채우지 않았으므로 더 이상 달릴 수가 없다. 게다가 엔진에 무리가 가해져 그만 고장이 나고 말았다. 설령 기름을 다시 채운다 해도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다.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 극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자동차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인생을 좀 더 오래 누리며 자신이 품었던 꿈을 활짝 펼치려면, 잠시 멈춰 서서 쉬어가는 여유로움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멈추어 쉼표를 찍은 뒤 가만히 귀 기울여 보면 아름다운 새들의 지저귐과 너그러운 나무들의 대화가 귓전을 은은히 울릴 것이다. 그렇게 멈추어 쉼표를 찍은 뒤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면 갓 태어난 아기 새의 몸짓과 영롱한 이슬을 머금고 수줍게 핀 들꽃과 너그럽게 침묵하는 여유의 숲이 반겨 줄 것이다.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도 얼핏 보일런지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가 오랜 동안 품고 있었던 푸른 꿈도 보일지 모른다. 이 모든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가 무작정 앞만 보고 쉼 없이 달려오느라 보고 듣지 못한 채 놓쳐 버린 소중한 것들이다.

‘오래 엎드린 새는 반드시 높이 날고, 앞서 핀 꽃은 홀로 먼저 지느니라. 이를 알면 발 헛디딜 근심을 면하고, 조급한 마음을 덜 수 있으리라.’

채근담에 나오는 말이다. 이는 무작정 급하게 서두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잘 표현한 말이다. 속성속패(速成速敗)라는 말도 있다. 아무렇게나 급하게 이루어진 것은 쉽게 결딴이 난다는 뜻으로 이 또한 신중치 못하고 빨리 이루려고만 하는 어리석음을 빗댄 표현이다.

그렇다. 급한 마음은 대체로 짧은 생각을 낳게 되고, 그런 생활 패턴으로 살다 보면 원치 않는 사고와 불행에 맞닥뜨릴 수도 있다. 과연 우리는 어떤가? 속칭 ‘빨리 빨리 문화’에 이미 젖어 날마다 일분일초를 다투는 숨 막히는 생존경쟁에서 과속의 페달을 힘껏 밟아 대고 있다. 학창 시절 국어시간에 배웠던 쉼표의 아름다운 의미는 이미 그 색이 바랜 채 마침표도 생략된, 길고 긴 문장 잇기에만 여념이 없다.
 
무작정 달려가다 보면 놓치는 게 많다. 잠시 쉬어 가며 파란 하늘에 드문드문 걸린 조각구름도 감상하고, 흐르는 시냇물에 두 발을 담근 채 잊혀진 옛 노래도 한 곡쯤 기억해 내는 여유가 필요하다. 무얼 망설이는가? 지금 바로 삶의 자동차를 멈추고 진정한 삶의 ‘쉼표’ 하나를 느긋하게 찍어 보기 바란다. 아마 당신의 인생은, 쉬어 가는 그 순간부터 새로운 싱그러움으로 당신을 반갑게 맞이해 줄 것이다.        

우리도 이제 “빨리 달려가면 갈수록 삶이 여유로워지기는커녕 더 빨리 달리라고 채찍질 당한다.”는 피에르 쌍소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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