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시선으로 본 제4차산업혁명-‘문제는 공감이다’(9-6)

박경만 교수(한서대학교 문예창작학부).
박경만 교수(한서대학교 문예창작학부).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지난 1992년 미 대선에서 빌 클린턴이 감히 게임도 안 될 것 같았던 조지 부시를 누를 수 있었던 비결이다. 명문 집안 출신의 부시는 슈퍼 마켓 한번 안 가본 것 같은 귀족적 이미지였고, 대다수 평범한 미국인들과는 다른 별천지 인물로 비쳐졌다. 클린턴 캠프는 이 점을 노렸다. 컨설턴트 제임스 카빌은 ‘소시민’스런 형이하학의 먹고 사는 문제를 타깃으로 삼았다. 가난과 배고픔이 무엇인지 함께 고민하는 포즈를 취했다. 고매한 정치가로서 부시와는 달리, 미국인들은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이해할 법한 클린턴에 공감하고 빠져들었다. 실제로 청소년기 마약까지 하며, 힘든 성장 과정을 겪은 클린턴이 대중과의 공감능력에 있어서 부시보다 한 수 위였던 것이다.

부시는 해군조종사부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국가에 대한 헌신과 화려한 성취의 연속이었다. 보통의 미국인들은 결코 겪을 수 없는 특별한 삶이었다. 애국, 리더십, 충성과 헌신, 그리고 위대한 미국의 건설…. 그러나 그런 화려한 것들은 평범한 미국인들에겐 지루한 프로파간다에서 나온 독사(doxa)일 뿐, 자신들의 구체적 삶과는 무관했다. 당장 눈 앞의 일상적 생존의 공간에선 그저 권태로운 수사였다. 그래서 부시딴에는 미국민을 모두 정확하게 이해하고 깊이 통찰했다며 자부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했다. 자신의 ‘눈’으로 타인들의 상태를 봄으로써 감정은 물론 최소한의 인지적 공감에도 실패하고 만 것이다.

비슷한 사례는 형편없이 쪼그라든 미국 자동차 산업에서도 볼 수 있다. 오늘날 미국차는 국내 시장 점유율 50%를 턱걸이하고 있다. 역시 공감 부족이 문제였다. 그 극단적 사례가 미국 자동차의 고향 디트로이트다. 이 도시엔 수입차가 드물다. 오직 미국산만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다. 시장이 호황이었을 때 자동차 회사들은 자사 직원과 그 사돈의 팔촌까지 공짜에 가까운 값으로 차는 물론 연료도 제공했다. 직원들은 대만족이었다. 굳이 ‘미국차’ 외의 다른 차를 염두에 둘 것도 없고, 형태와 특징 등 고객 취향에 신경쓸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자신들만의 유리벽, 그 너머의 소비자들은 모두 외면했고 그들은 고립되었으며, 미국의 자동차 산업은 2류로 추락하고 말았다. 공감능력 부족이 낳은 미국 자동차산업의 비극적 단면이다.

‘공감 부족’을 가설하고 추정해보면 결국 ‘이기심’이란 가추법적 결과로 이어진다. 이기심으로 무장하고, 자기만을 돋보이게 한 사람과 사물에만 보상을 하는 사회는 불행해지기 쉽다. 요즘 시중의 베스트셀러 서가를 장식하는, 절대적 자기애나 ‘긍정’ 지상주의 심지어 ‘카르페 디엠’식 실존감 만능의 텍스트들도 ‘이기심’의 또 다른 성형이 아닌지 의심해볼 일이다. 그런 성형의 결과는 필시 불안정하고 불안한 세상으로 이어진다. 설사 디지털혁명이 만개하고 공유경제와 첨단 사이버네트워크가 풀가동하여, 부의 총량은 극한을 치닫을지언정 한 사회의 행복 총량은 쪼그라들 수 밖에 없다. 세상은 날로 불평등해지고, 신뢰는 바닥을 치며 긴장과 불만은 고조된다. 그야말로 불행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공감능력은 인류의 절대 과제이자 미덕이다. 풍부한 사회성, 고도의 감성지능과 인지력, ‘타인’을 내면화하고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가슴-. 그런 것들이말로 인류사를 관통한 모든 미덕을 모아놓은 공시태(共時態)적 4차산업혁명 정신이 되어야 한다. 이는 개인은 물론, 수많은 개인들인 소비자가 얽혀있는 기업과 시장 네트워크에서도 필수다. 그것이 블록체인이든, 어떤 기상천외의 플랫폼이든 그 바탕엔 진실된 공감능력이 스며있어야 한다. 언어와 언어 바깥의 것들이 복잡하게 짜여진 인간세의 텍스트에서 늘 독백적 담화에 저항하며 대화해야 한다. 텍스트 간의 경계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공감은 그래서 야수가 아닌 인간들의 세상을 위한 최후의 방어선이다. ‘모 아니면 도’를 강요하는 미래 디지털 세상에선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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