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지난 주말, 윤동주 문학관을 다녀왔다. 해마다 8·15 광복절을 앞두고서 치르는 나의 연례행사(?)다. 종로구 인왕산 자락에 위치한 ‘윤동주 시인의 언덕’에서 바라본 그의 문학관은, 하늘로 뚫린 작은 우물 같은 모습이었다. 시 ‘자화상’에서 우물 속에 비친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가다, 그 사나이가 가엾어져 다시 우물로 돌아오던 그였다. 개관 6년째를 맞는 그의 문학관을 다시 돌아보고 나니, 시와 삶 속에 녹아들었던 그의 고뇌가 한층 더 가깝게 다가왔다.

2012년 7월에 문을 연 문학관은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있는 청운공원 일대의 쓰지 않는 수도 가압장과 물탱크를 활용, 윤동주 시인의 시 세계를 잘 표현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시인의 사진자료와 친필 원고 영인본을 전시한 ‘시인채’, 물탱크의 윗부분을 개방해 중정(中庭)을 조성한 ‘열린우물’, 시인의 일생과 시 세계를 담은 영상물을 전시한 ‘닫힌우물’로 구성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윤동주 ‘별 헤는 밤’ 중에서)

1941년 산문 형식으로 씌어진 ‘별 헤는 밤’에는 어린 시절의 애틋한 추억을 되새기며 조국의 광복을 간절히 염원하는 열망이 담겨 있다. 시인은 가을밤을 배경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으로 표현했다. 도도한 물결과도 같은 내재율을 지니고 있어 읽는 이와 듣는 이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시인이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것은 연희전문학교 재학 시절이다.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시인으로 평가받는 그는, 재학 시절 세종마을(현재 종로구 누상동)에 있는 소설가 김송(金松) 집에 하숙하며 ‘별 헤는 밤’, ‘자화상’, ‘쉽게 씌어진 시’ 등 소중한 작품을 남겼다. 모든 내적인 방황과 자신을 짓눌렀던 역사의 무게를 시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1941년 11월, 연희전문 졸업을 앞둔 윤동주는 그때까지 써 놓은 시 가운데에서 18편을 뽑고 여기에 ‘서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엮는다. 그런 다음 시집 원고를 3부 필사해 1부는 자신이 갖고, 1부는 이양하 교수에게, 나머지 1부는 함께 하숙하던 후배 정병욱에게 맡긴다. 1부를 이양하 교수에게 바친 것은 출판을 주선해달라는 것이었는데, 그에 대한 이 교수의 답변은 출판을 보류하라는 것이었다. 일제 관헌의 검열을 통과할 수 없을뿐더러 신변에 위험도 따를 수 있다는 이유였다. 

학병으로 끌려가는 정병욱은 이 원고를 고향 어머니에게 맡겼다. 양조장을 하는 그의 어머니는 원고를 커다란 독에 넣고 마룻바닥을 뜯어 그 아래에 숨긴 뒤 잘 보관했다. 결국 이 원고가 윤동주의 마지막 시가 됐고 해방 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정병욱이 아니었으면 윤동주의 시는 아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1945년, 일본 유학 중이던 그는 민족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된다. 그리고 생체실험으로 의심되는 정체 모를 주사를 맞으며 고통을 당하다 28세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사후에 단 한 권의 시집만이 출간되었을 뿐이지만,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시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남았다. 

윤동주. 그는 일제 식민지에서 수많은 내적 갈등을 겪으며 지식인으로서의 고뇌를 아름다운 시로 남긴 우리의 대표 시인이다. 또한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 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파하고 고민한 철인(哲人)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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