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시선으로 본 제4차산업혁명-‘그 서사적 조건을 묻다’(10-1)

박경만 교수(한서대학교 문예창작학부).
박경만 교수(한서대학교 문예창작학부).

더 나은 세상이란 어떤 것인가? 인간정신의 발흥이나 해방은 또 무엇인가?-. 이런 질문은 4차산업혁명이 가시화될수록 반드시 따라붙는 절박한 외침과도 같다. 그 절박함은 20세기까지 자행되어온 문명이란 이름의 폭력, 이성과 합리성이 저지른 횡포에 대한 진절머리 나는 기억과도 맞닿는다. 진보나 창의, 발전, 계몽 따위의 미끈한 단어들도 한낱 권태로운 수사에 그쳤던게 지난 역사였다. 그 때문에 새로운 디지털혁명을 앞에 둔 지금, 인류는 또 하나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그래서다. 0과 1이 우주 동력이 되는 전환기엔 ‘이건 이렇다’는 종결의 언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애초 0과 1의 조합은 대립도, 화합도 아닌 무궁무진한 ‘이항(二項)’의 만물 조화를 생성한다. 반면에 인간과 삶의 스테레오타입(stereotype)은 그것과 맞지 않는다. 지난 날 인류는 문명의 텍스트를 제 마음대로 정형화하고 서사의 종결을 왜곡하길 서슴지 않았다. 이는 근대 이후 짜리즘, 쇼비니즘, 파시즘, 볼세비즘, 생디칼리즘, 제국주의, 네오콘, 신자유주의 등 온갖 파편화된 도그마를 생산하곤 했다. 그로 인해 근 100여 년 간 인류는 지구상에 인간이 출현한 이래 가장 큰 치명상을 입었다. 그렇다고 문명의 지시를 노예처럼 따르기만 해서도 안 된다. 그랬다간 물질이 인성보다 앞선 지난날의 우(愚)를 또 되풀이한다. 

지금, 인류적 서사를 새롭게 써내려가야 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수사학자 프랭크 커모드는 “안락함을 주면서도, 논쟁하기엔 껄끄러울 수 있는 한 사회의 신화적 구조”를 깨야한다고 조언했다. 맞는 말이다. 특히 ‘산업혁명’이라는, 새롭게 구조화된 신화적 기제가 작동할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것이 4차가 되었든, 5차가 되었든 “산업혁명이란 이래야 한다”는 규범화나, “앞의 일(기술? 시스템?)이 뒷 일(기술의 지배, 반인간적 시스템 등)의 원인이 된다”는 아메바적 인과관계는 수용하기 어렵다. 본디 앞과 뒤, 둘은 별개다. 그처럼 기술과 자본, 인간의 ‘본질’은 무시한채, 그 경험적 인과만으로 구성된 서사담화 또한 곤란하다. ‘부요(富饒)’와 풍요, 기술과 인간의 상대화 등 정형화된 마스터플롯의 감옥에 갇혀서도 안 된다.

바람직하기론, 인간, 그리고 ‘인간 중심의 모든 사물’이 산업혁명 서사 속에서 생동감있게 살아나야 한다. 흔히 말하는 기술과 디지털 물리학, 합성생물학, 나노와 양자역학, 무인화, 인공지능, 사이버네트워크 등 문명 기호에 대한 해석도 가변적이어야 한다. 모든 문화요소가 그렇듯이, 다양하고 가변적인 맥락이 관여하므로, 단일하고 절대적인 해석은 금물이다. 특히 산업혁명 기호의 해석은 재현, 혹은 표상을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야 한다. 대신에 그것이 갖는 문명 서사로서의 의미, 즉“왜? 산업혁명인가?”란 물음 따위가 해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 결과가 ‘일하지 않을 권리’가 되건, ‘인공지능을 인간의 노예로 부리는 것’이 되든 상관없다. 

그렇다고 그런 문명론적 답변과 결론을 미리 예측하도록 결말을 가둬놓아도 안 된다. 그야말로 새로운 산업혁명은 ‘기술이 이러하므로, 인간은 이래야 한다’는 식의 약속된 코드가 되어선 안된다. 대신 인간과 기술, 자연이 각기 다양한 코드를 생성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예정된 마스터플롯을 사용한 산업혁명 담화는 새로운 문명 장르를 생성할 수 없다. 아무런 코드가 없는 상태, 즉 목적론적 사전 인식이 없는 상태에서 이치를 깨치고 상상력을 발휘하며 나름의 존재적 이유를 찾아내는 방식이 필요하다. 그런 탈코드 혹은 과소코드화의 방식이야말로 산업혁명 서사의 조건이다. 그러면 ‘왜, 4차산업혁명을 해야 하나’, 또는 ‘왜, 어떻게 살 것인가’를 테마로 한 새로운 서사가 가능하다. 곧 인간이 산업혁명 서사의 실제 저자로서, 문명 기호의 유일한 생산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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