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시선으로 본 제4차산업혁명-‘그 서사적 조건을 묻다’(10-3)

박경만 교수(한서대학교 문예창작학부).
박경만 교수(한서대학교 문예창작학부).

e-스포츠가 아시안게임의 시범종목으로 채택되었다. 실물이 아닌 가상의 온라인공간에서 게임 프로그램을 통해 승부를 겨루는 경기가 e-스포츠다. 흔히 잘 알려진 스타크래프트, 워크래프트, 카트라이더 등의 게임이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오프라인의 관성으로 보면 컴퓨터 화면에 그림과 영상으로 온갖 스릴과 서스펜스가 펼쳐진들, 기계 전원을 끄는 순간 모든게 스러지고 마는 허망한 잔상일 수도 있다. 녹색 그라운드나 트랙에서 온몸이 흠뻑 땀에 젖은 선수들만을 기억한다면, “이게 무슨 스포츠냐” 싶기도 하다. “스포츠란 이래야 한다”는 전래된 ‘스포츠의 유형’에 충실한 경우 그렇다. 

우린 세상의 모든 것들을 ‘유형’으로 분류하는데 익숙하다. 허나 돌이켜보면 세상의 본질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의 유형으로 특정할 수 없는, 마구 뒤섞인 복합체다. 하나의 존재나 실체라도, 그 속엔 선과 악, 허위와 진실, 추함과 아름다움이 모두 속해있다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 그래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경계나 제약을 뛰어넘어, 새로운 변형과 제네시스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특히 인간과 인간성은 풍부하고 복잡하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건 이것이다”라는, 유형화된 서사적 진술로는 결코 포착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존재가 인간이다. 그래서 정색하고 유형화(類型化)된 모든 것들은 기만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네 문명은 지금껏 대상에게 특정한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곤 했다. 그리곤 그 유형들로 만들어진 마스터플롯을 설정해야 직성이 풀리곤 했다. 사르트르는 이에 대한 회심의 고백을 한 바 있다. “내 평생의 삶은 마스터플롯에서 주요한 역할을 맡는 고귀한 유형에 맞춰 살아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런 눈으로 보면 인간과 사물을 특정 유형으로 한정하는 일은 더없는 폭력이다. 돌이켜보면 인류문명은 모든 것을 평면화, 유형화함으로써 숱한 비극적 결말을 연출하곤 했다. 집시, 유대인, 흑인, 반역자, 이교도, 남성과 여성, 선과 악, 우등과 열등과 같은 어휘가 모두 그런 것들이다.

이른바 디지털혁명은 4차원을 넘보는 사이버 세상과 무한기술의 실현이다. 본질적으론 만물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깨는 노력, 즉 탈유형화가 생산하는 첨단의 서사라고 해야겠다. 이는 “A는 필시 B이기 마련”라는 고착된 의미화를 거부한다. 마치 평평하게 땅을 고르듯, 입체적이고 다양한 곡면과 특성을 평면으로 만들어버리는 걸 경계하는 것이다. 

그래서 디지털혁명은 인류 사상 최대의 ‘해체’ 작업이기도 하다. 수 천 년의 관념을 무장 해제하고, 무한대의 최신 유형들을 복제하고 생성하는 것의 기록이다. 이분법적인 합리와 논리, 가치를 가차없이 파괴하고, 가치전도에 가까운 반역을 꾀하는 프로세스다. 그 무대에선 그 주체들의 캐릭터나 스토리가 유형화되어서도, 될 수도 없다. 대신에 그들 문명 주체에게 충분한 인격을 부여하는 공정이며, 탈유형화를 통해 모든 것을 새롭게 해부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엄청나게 증대시키는 지난한 작업인 것이다.

혹자는 감히 신의 영역과 흡사한, 새로운 호모데우스적 질서를 꿈꾸는게 디지털혁명이라고 했다. 그 ‘혁명적’인 전복의 서사는 단순한 기술혁명을 뛰어넘는 인간 내면의 재활까지 요구한다. 그러나 그 초월적 문명의 꿈은 인위적 원근법에 의한 틀짓기론 어림도 없다. 인간의 시선이 만든 유형화의 감옥을 벗어난, 신의 경지에서나 있음직한 해방된 조화에서만 가능하다. 그것이야말로 4차산업혁명이 정당화되는 이유가 될 수 있고, 그 어떤 기술적 천지개벽에 앞서, 디지털혁명을 낙관하게 하는 것이다. e-스포츠가 아시안게임 시범종목이 되었다는 소식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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