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시선으로 본 제4차산업혁명-‘그 서사적 조건을 묻다’(10-4)

박경만 교수(한서대학교 문예창작학부).

‘잘 먹고 잘 산다’는 건 인간의 부정할 수 없는 삶의 ‘목표’인지도 모른다. 제 아무리 형이상(形而上)의 가치나 윤리를 들먹인다 한들, 그 바탕엔 그런 ‘속물’적 모티브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는게 인간 존재의 민낯이다. 그래서 태초 이래 인간사는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솔직한 노력과, 위선으로 치부될지언정, ‘왜 사냐?’는 본질적 물음이 치열하게 부딪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허나 어떤 방식이 되었든, 단 한 가지 인간이 풀지 못한 숙명적 종결 지점이 있다. 바로 ‘죽음’이다. 

‘죽음’은 영원히 다가갈 수 없는 초(超)형이상의 그 무엇이다. 더 읽을 수도, 덜 읽어낼 수도 없는, 적확(的確)한 구성과 결말로 표현되는 엄숙한 서사다. 그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불변의 플롯을 인간은 최근 고쳐쓰려 한다. 인공지능과 합성생물학, 나노기술 따위로 인간의 신체적·지적 능력을 신적 경지로 끌어올리고, 인간과 기계의 융합을 주장하는 이데올로기가 그것이다. 이른바 트랜스휴머니즘(Trans Humanism)이다. 이는 인간 존재의 유한함과, 이를 부정하는 신적(神的)인 인간 곧 ‘호모데우스’ 층위의 경합이다. 

이에 특히 주목했던 물리학자 리처드 존스는 “트랜스휴머니즘은 과학이라기보단 종교에 가깝다”고 진술한 바 있다. 또 “인류의 근원적인 신화‘라고 했다. 하긴 신화란 무엇인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방식과 현상에 대한 자유롭고 무한한 상상소(素)의 표출이다. 과학, 합리, 이성을 뛰어넘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해줄 초월적 존재를 숭배하고, 심지어 불멸의 경지에 도달할 능력을 믿는 것이다. 그 추론의 여지를 확장하면, 과학이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줄 것이란 믿음이 생성되고, 그 이데올로기가 곧 트랜스휴머니즘이다.

어쩌면 ‘죽음’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영원한) 마스터플롯인지 모른다. 인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절망적 조건으로부터 인간의 서사를 무한 생성하게 하는 모티브다. 실락원에서나 만끽했던 ‘영생’이란 가능세계를 반복 회고하는 절박한 라이릭(lyric)의 원소이기도 하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한 오이디푸스에게서도 우린 그 상충되는 두 얼굴의 플롯을 읽어낸다. 신과 운명에 의한 형벌, 즉 행위에 대한 결정론적 승복과, 스스로에 대한 처벌과 방랑이라는 자유의지 간의 갈등. 그로부터 신과 운명에 대한 복종과 저항이란 장편서사의 도발적인 담화를 읽어내곤 한다. 

그처럼 인생은 그것이 내포한 삶의 조건들과 관계 맺는 방식 자체다. 온갖 삶의 서사적 갈등과 마찰, 즉 아곤(Agon)에 대한 협상이 그 본질이며 과정이다. 그런 복잡다기한 서사의 종결은 우리 스스로, 우리 손으로 인증하고 끝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죽음’이 곧 그것이다. 허나 이제 인간은 우주 생성 이래의 그런 섭리를 뒤엎는 도전장을 내밀었다. 삶과 죽음의 틈을 인간 스스로 메꾸고, 필요하다면 영생과 영원함을 누릴 수 있음을 선포한 것이다. 곧 신과의 한판 ‘맞장뜨기’이며, 존재론적 ‘목숨’을 건 도박이다.

그래서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트랜스휴머니즘’을 “인류 역사상 최대의 위기이며, 비극적 서사의 매체”라고 했다. 하긴 4차산업혁명 자체가 애초 거대한 ‘문명 해체’이긴 하다. 현실의 어떤 것에 대해 ‘이건 이러하다’는, 확고한 의미 매기는 걸 해체하는 것이다. 이제 ‘죽음’도 그 대상이 될 판이다. 인간 서사의 종결을 인간 마음대로 해체하고 조합할지 모른다. 허나 예측불가의 결말은 서사의 백미가 아니던가. 결말을 알 수 없어야 스릴과 서스펜스를 즐길 수 있고, 이야기는 재미있게 마련이다. 장차 그런 재미가 사라진다면? 우리 인간은 서사를 읽는 즐거움을 영원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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