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여름 내내 한반도를 펄펄 끓게 했던 ‘불가마 더위’도 한 차례의 태풍이 지나간 뒤 한풀 꺾인 모양새다. 이미 처서(處暑)도 지난 터라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한 기운이 옷깃을 스쳐간다. 24절기 가운데 열네 번째 절기인 처서는 입추(立秋)와 백로(白露) 사이에 있다. 여름이 지나 더위가 가시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하게 된다는 의미로, ‘더위가 그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제 가을의 문턱에 들어선 셈이다. 

처서가 지나면 따가운 햇볕에 누그러져 풀이 더 이상 자라지 않기 때문에 논두렁의 풀을 깎거나 산소를 찾아 벌초한다. 예전의 선비들은 여름 동안 장마에 젖은 책을 음지(陰地)에 말리는 음건(陰乾)이나 햇볕에 말리는 포쇄[曝曬]를 이 무렵에 했다. 독서의 계절을 맞이하기 위한 선견(先見)이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

흔히 독서의 계절이라 하면 가을을 떠올리게 된다. 무더위도 한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니 책 읽기 좋은 시기인 것이다. 선인들 또한 ‘등화가친(燈火可親)의 계절’이라는 표현으로 가을에 책읽기를 적극 권장했다.

게다가 선인들은 난세일수록 책읽기를 더욱 즐겨하고 열심히 했다. 그분들이라고 해서 시간이 마냥 넘쳐나고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시국이 어지러울수록, 삶이 고단할수록 선인들은 오로지 책 속에서 올바른 길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덕무(李德懋)의 독서는 매우 광적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간서치(看書痴, 책 읽는 바보)’라 쓴 글에서 “오로지 책 보는 것만 즐거움으로 여겨, 춥거나 덥거나 주리거나 병들거나 전연 알지를 못했다. 어릴 때부터 스물한 살이 되도록 하루도 손에서 책을 놓아본 적이 없었다. 그 방은 몹시 작았지만, 동창과 남창과 서창이 있어 해의 방향에 따라 빛을 받으며 글을 읽었다”고 했다. 가난한 서얼출신인 그는 남의 책을 베껴주는 품을 팔면서 책을 읽었다.

책 읽기를 즐겼던 선인들의 경우, 독서는 일상 그 자체였다. 위나라 관리 상림(常林)은 밭을 갈면서도 책을 읽었다. 당나라 이밀(李密)은 쇠뿔에 ‘한서(漢書)’를 걸어놓고, 꼴을 먹이면서 잠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후한의 고봉(高鳳)은 아내가 장을 보러 간 사이 마당에 널어놓은 겉보리가 소나기에 떠내려가는 줄도 모르고 책만 읽었다. 

이처럼 치열했던 선인들의 열정을 접할 때마다 갈수록 식어가는 현대인의 독서열이 한없이 부끄럽기만 하다. 서적 보급률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출퇴근하며 책을 펼쳐 읽는 모습은 이제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공원 벤치에 앉아 독서하는 모습이 마치 구시대의 유물인 양 퇴색해 버린 게 우리의 현주소다. 

아시아계 여성으로 첫 하버드대 법대 종신교수로 임명돼 화제가 된 바 있는 석지영(미국명 Jeannie Suk) 씨는 “영어 한 마디도 못하던 내가 오늘날 이 자리에 선 것은 책을 통해 내 갈 길을 스스로 깨닫게 해준 엄마의 힘이었다”고 말했다. 

예일, 옥스퍼드, 하버드 등 세계 유수의 대학을 나온 그녀가, 6살 때 미국에 이민 갔을 무렵엔 갑자기 바뀐 문화와 언어 환경에 적응하느라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엄마에게서 책을 찾는 방법을 배워 스스로 책을 찾아보고 깨닫는 즐거움을 누렸고, 자유를 추구하는 힘을 키웠던 것 같다고 했다. 책을 많이 읽은 덕분에 그녀의 연구 분야는 다른 법학자와는 다른 융합적인 길로 가고 있다. 

일본의 메이저급 신문사 사장이 “한국이 일본을 월등히 앞서지 못하는 것은 독서량 차이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한국의 연간 도서발행 실적은 일본의 3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순수과학과 예술서적은 10분의 1에도 채 못 미친다. 이런 통계 앞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우리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을 가진 문화강국이요, 안중근 의사의 말대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글 읽는 지적(知的) 전통을 지닌 민족이다. 73주년 광복절 의미를 되새기며 진정한 극일(克日)이 무엇인지 냉철한 고민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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