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회사 업무차 종로의 대형 서점들을 종종 순회한다. 내가 몸담고 있는 회사에서 출간한 책들이 적절한 곳에 잘 비치되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함이다. 그때마다, 지난날 서울의 문화적 향기를 짙게 풍기던 그 추억에 잠시 물들어 보기도 한다. 갈수록 삭막해지는 도심 풍경에 대한 일종의 반발심(?)일까. 아무튼 그 문화적 향기의 추억은 쉽게 지워지질 않는다. 

그 추억의 한가운데에 옛 종로서적이 있다. 지금도 그곳을 떠올리면 그 앞에서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인다. 종로서적이 일반인들에게 친숙했던 것은 젊은이들의 약속 장소로 이곳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큰길 쪽으로 나앉아 있어 쉽게 찾을 수 있기도 했지만 100년 가까운 세월을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는 탓도 있었다. 1907년에 문을 열었으니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이었다.   

6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종로에서의 만남은 으레 종로서적 앞이었고, 때로는 6층 문학코너나 4층 인문코너에서 만나기로 하는 등 종로서적 그 자체가 약속 장소였다. 일부 젊은이들은 그곳에서 어슬렁거리며 책도 몇 권 훔쳐보았고, 주말이면 동대문 헌 책방까지 데이트 하며 책 순례(?)의 길에 나서기도 했다. 이처럼 종로는 젊음이 넘쳐나는 거리이자 문화의 숲이었다. 특히 서점은 누구나 즐겨 이용하는 약속 장소였다. 

80년대만 하더라도 무교동 낙지집이나 종로거리 식당, 주점에 가면 출판계 지인들과 눈 마주치기가 바빴다. 유명작가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보는 일도 흔했고, 서점과 출판사 간에 정보를 교환하기에도 수월했다. 이처럼 종로는 출판문화의 거리였으며 그 향내가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90년대 초까지 종로통엔 ‘종로서적’과 ‘동화서적’ ‘삼일서적’ ‘양우당’ 같은 서점과 극장이 몰려 있었다.

종로는 일제강점기에도 출판문화의 중심 거리였다. 그 무렵 지식인들은 지금 YMCA 옆에 있던 우미관(優美館)에서 영화를 보고, 기독교서회서점, 박문서관, 영창서관에 들러 책을 사는 것이 대단한 즐거움이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대부분의 서점들이 출판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지방 서점업자들은 모두 종로 거리에 와서 책을 구입해야 했다. 

그러나 90년대에 접어들면서 종로는 문화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차츰 잃어 가기 시작했다. 서점이 하나 둘 문을 닫더니 2002년엔 종로서적까지 셔터를 내리고 말았다. 결국 서적시장에 불어 닥친 변화의 바람에 대처하지 못한 채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순수하게 서점으로 출발해 대형화를 이뤘다는 점에서 교보문고나 영풍문고와는 그 뿌리가 달랐던 옛 종로서적은 한 시대의 ‘문화 코드’가 추억 속에 묻혀 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출판사들도 대부분 강남이나 경기도 파주 등 외곽으로 옮겨가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몇몇 대형서점들이 전통을 잇고 있지만 지난날의 훈훈하고 정겨웠던 서점문화는 거의 사라졌다. 출판·서점의 중심지로서 종로의 시대가 막을 내린 것이다.

문을 닫는 서점이 갈수록 늘어가는 것이 세계적인 현상이라고는 해도 책과 독자가 만나는 유일한 장소가 차츰 사라진다는 점에서 볼 때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화가 어디로 흐르는지, 남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를 구체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공간의 상실이다. 책의 향기와 소리, 지식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곳을 잃고 있다는 심각성 또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중소 서점의 폐업 현상은 우리가 정신적인 여유를 잃고 있으면서도 절박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방증이라고 볼 수 있다. 날마다 숨 가쁘게 진행되는 신축, 또는 재개발 등의 물리적 변화를 겪으며 어쩌면 우린 앞서간 분들이 남긴 문화적 향기를 아예 잊고 사는 게 아닌지 한번 쯤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즐비한 서점들 간판 아래, 작가와 교사, 학생, 직장인의 물결로 넘쳐나던 그 시절, 종로통의 문화적 향기가 더욱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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