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지난 9일, ‘한글날’이 올해로 572돌을 맞았다.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세종대왕의 성덕과 위업을 추모하기 위한 기념일로 몇 해 전부터 국경일로 격이 높여져 법정공휴일로 부활했다. 한글날을 처음 제정한 것은 우리가 일제강점기에 있던 1926년의 일이다. 그 서슬 퍼렇던 시기에 우리의 선조들은 가혹한 핍박을 받으면서도 끝내 한글을 지켜냈다. 

‘한글학회’는 한국 최초의 민간 학술단체인 ‘조선어연구회’로 창립한 이래, 1931년에는 ‘조선어학회’로, 1949년부터는 현재의 ‘한글학회’로 부르게 되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나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될 무렵에는 이미 국권이 피탈돼 일제의 탄압이 그야말로 극에 치닫고 있었으므로 우리말과 글을 떳떳하게 쓸 수도 없는, 치욕의 한(恨)을 피눈물로 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극악무도한 일제의 만행 앞에서도, 민족의 정기가 오롯이 살아 숨쉬는, ‘한글’을 수호하기 위한 눈물겨운 사건이 하나 있었다.

1945년 9월 어느 날, 조국이 일본의 압제에서 벗어나 광복의 희열에 들떠 있을 무렵, 경성역(현 서울역) 조선통운 운송부 창고를 뒤지던 경성제국대 학생들이 방대한 분량의 원고뭉치를 발견하고는 환호성을 지른다. 그간 행방이 묘연했던 원고를 찾기 위해 함흥 검찰청에 문의도 했고, 서울 검찰청을 뒤지기도 했으나 허사였다. 그런데 그토록 애타게 찾던 원고를 경성역 어두침침한 창고 한 구석에서 찾아낸 것이다. 2만 6500여 장에 이르는 이 원고뭉치는 ‘조선어학회사건’ 무렵, 일제에 사건 증거물로 압수당했던 ‘조선어사전’ 핵심원고였다. 

조국해방을 맞아 경성제국대 학생들이 끈질긴 추적 끝에 찾아내고야 만 ‘사전 원고뭉치’는 그야말로 하늘이 우리 민족에게 내린 엄청난 축복이었다. 일제의 온갖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우리말 사전 편찬의 뜻을 펼쳐 온 여러 학자들의 고초가 결코 헛되지 않았던 것이다. 1947년 10월 9일, 드디어 ‘조선말 큰사전’ 제1권(을유문화사刊)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이는 국가의 수립에 앞서 표준언어작업이 먼저 길을 열었다는 깊은 뜻도 담고 있었다. 하마터면 허공으로 사라져 오랜 세월이 지체될 뻔 했던 ‘조선말 큰사전’이 우여곡절 끝에 태어남으로써 민족의 혼을 담은 빛나는 결정체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글을 지켜내기 위해 선인들이 감내한 희생과 노력을 헤아리다 보면 지금 우리의 현실은 그저 참담(?)하기만 하다. 길을 나서면 온갖 외래어가 난무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빌라나 아파트의 이름부터 화장품, 패션, 자동차, 홈쇼핑, 그리고 아이들이 많이 접하는 과자와 문구류 등이 온통 외래어 일색이다. 우리가 과연 어느 나라에 살고 있는지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방송은 마치 외래어 경연대회를 벌이는 것 같다.

게다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일본어 잔재도 여전하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무분별하게 일본말을 하고 일본문화를 접하고 있다. 말로만 일제 잔재 청산을 외쳐서는 곤란하다. 가장 시급한 것이 바로 언어다. 어려운 한자말도 너무 많다. ‘가장 쉬운 말이 가장 훌륭한 말’임을 잊고 있다.

‘한글’은 1997년 세계기록유산에 당당히 올랐으며 세계 64개국 742개 대학에서 우리의 ‘한글’을 가르치고 있다. 현재 지구상에는 200개가 넘는 많은 나라가 존재하고 있다. 이 가운데, 고유의 언어와 문자를 함께 가진 나라가 과연 얼마나 될까? 각 나라마다, 언어는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고 해도 민족 고유의 문자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세종대왕께서 창제하신 우리 ‘한글’은 어느덧 대한민국의 대표적 문화상품이 되었다.

국어순화운동은 ‘국어를 바르고 순하게 만드는 운동’이다. 물밀 듯 밀려드는 외래어로부터 우리말을 지키는 운동을 꾸준히 펼쳐야 한다. 까다로운 한자어도 마땅히 쉬운 우리말로 고쳐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순수한 국어를 살려 쓰는 민족은 번영하고 그렇지 못하는 민족은 망한다”라고 한 어느 독일 철학자의 무서운 충고가 가슴 깊이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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