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요즈음 국정감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국회가 국정 전반에 대한 조사를 행하는 것으로 국회가 입법 기능 외에 정부를 감시 비판하는 기능을 가지는 데서 인정된 것이다. 그런데, 매스컴을 통해 전해지는 국정 감사장의 면면들을 들여다보면 이른바 ‘말의 홍수’라고 일컬어도 손색이 없겠다. 정부가 한 해의 살림을 어떻게 잘 꾸려 왔는지를 검증하는 장소라기보다 그저 여야의 자존심을 건 ‘말씨름’, 또는 ‘말장난’으로만 비쳐질 때도 있다.

그런데, 어디 국회뿐이겠는가. 연일 매스컴 또는 SNS를 통해 난무하는 상대 비방성 발언이나 정제되지 않은 각종 댓글의 심각성은 이제 그 위험 수위를 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현 주소가 이러할진대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자칫, ‘말의 테러’에 우리 사회가 스스로 멍이 들어 무너지지나 않을까 매우 염려스럽기까지 하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말을 주고받는다. 따라서 가끔 말실수도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순간의 감정에 치우쳐서 하는 말실수는 한 사람 한 사람 거쳐 가면서 와전되므로 나중에 그것을 수습하려면 큰 어려움이 따른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삶의 훼손이라는 큰 인생의 오점으로 남을 수도 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니 나도 신중하지 못한 말로 인해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이로 인해 서로 간의 관계가 편치 못했던 경우가 더러 있었다. 무심코 내 뱉은 말이 와전되어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구설수에 휘말린 사람을 화젯거리 삼아 눈덩이처럼 커진 구설수에 덩달아 말을 더 섞었던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부끄럽고 낯 뜨거운 일이다. 

그러나 이순(耳順)을 넘기고, 나 보다 우선 상대방을 배려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차츰 몸에 익숙해진 뒤부터는, 행동도 중요하고 마음가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말을 조심해야겠다는 점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비로소 조금씩 알아가는, 뒤늦은 깨우침이 나를 차츰 더 침묵의 즐거움에 빠지게 한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언어는 공허하다’며 침묵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법정 스님은   법문(法文)의 말미에서 ‘내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내니 나머지는 저 찬란한 꽃들에게 들으라’고 맺곤 했다. 중국 명나라 때 문인 진계유(陳繼儒)는 ‘고요히 앉아 본 뒤에야 보통 때의 기운이 경박했음을 알았다. 침묵을 지킨 뒤에야 지난날의 언어가 조급했음을 알았다. 일을 되돌아본 뒤에야 전날에 시간을 허비했음을 알았다. 
욕심을 줄인 뒤에야 예전에 잘못이 많았음을 알았다.’고 했다. 어느 묵언(默言) 수행자는 ‘사람이 하루에 얼마나 쓸데없는 말을 많이 하고 있는 지를 침묵해 보면 안다’고 했다. 또한 셰익스피어는 ‘순수하고 진지한 침묵이 사람을 설득시킨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위대한 작곡가가 쉼표의 힘을 알 듯 위대한 연설가는 침묵의 힘을 안다. 때로 사람들은 말보다 침묵을 더 신뢰하고 침묵에 더 공감한다. 말보다 침묵이 진실에 훨씬 더 가까이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침묵의 마력은 과연 무엇이며 어디서 오는 걸까? 노자는 우주가 탄생하기 전의 상황을 ‘적요(寂寥)’라고 표현했다. 그것을 만물의 어머니, 즉 근원으로 보았다. 플루타르크 영웅전에는 ‘인간은 인간에게서 말하는 것을 배우고 하나님에게서 침묵을 배웠다’고 적혀 있다. 탈무드는 ‘침묵 속에 있는 사람은 신(神)에 가까이 가기가 쉽다’고 가르친다. ‘논어’에 ‘사불급설(駟不及舌)’이라는 말이 있다. 네 마리 말이 끄는 빠른 마차라도 혀의 빠름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숱한 말들이 홍수처럼 넘쳐나는 현대 생활에서, 때때로 침묵의 언어로 소통하며 그 깊은 뜻을 차분히 헤아리며 사는 것도 또 다른 멋이 있지 않겠는가.
 

저작권자 © 애플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