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봄비를 맞으면서 충무로 걸어갈 때/ 쇼윈도 그라스엔 눈물이 흘렀다/ 이슬처럼 꺼진 꿈속에는 잊지 못할 그대 눈동자/ 샛별같이 십자성같이 가슴에 어린다

이 노래는 타계한 가수 현인(본명 현동주)1969년에 부른 서울야곡의 일부분이다. 그는 해방 후부터 90년대 말까지 1천여 곡의 노래로 대중과 애환을 함께 해 왔다. 출세곡인 신라의 달밤부터 굳세어라 금순아’ ‘비 내리는 고모령’ ‘서울 야곡등 수많은 그의 히트곡은 우리 현대사와 호흡을 함께 해 왔다.

지하철 3·4호선의 승객이 환승하는 충무로역. 나는 이곳에서 출퇴근 때마다 열차를 갈아타야 한다. 이 역은 3·4호선에 승차한 승객이 강북이나 강남으로 이동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다. 오랜 세월 버텨온 대한극장과도 지하로 연결되는 곳이어서 충무로역하면 한 장의 영화 포스터가 이내 떠오를 만큼 영화의 메카다운 이미지가 잔뜩 서린 곳이다. 오랜 세월 이곳으로 숱한 발걸음을 해 온 나는, 아련한 추억이 밴 충무로 거리에서 가끔 비라도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곤 한다.

충무로는 서울시 중구 명동 신세계백화점에서부터 서울중앙우체국을 지나 충무초등학교 입구까지 총길이 1900m에 이르는 곳을 말하는데, 그 가운데서도 충무로 1~5가는 60~80년대 한국 영화의 메카였다.

그 무렵 이곳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화사가 존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본정통(本町通)이라 불렸는데, 광복 후 일제식으로 지어진 명칭을 개정할 때 이순신 장군의 시호를 따 붙이면서 충무로로 가로명이 제정되었다. 충무공 이순신의 탄생지가 이 길에서 멀지 않은 옛 건천동(乾川洞)이다.

충무로가 한국 영화의 발상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06년 경성부 진고개 부근의 송도좌(松島座)’라는 극장에서 처음 영화를 상영했을 무렵이다. 중구 문화원에서 발간한 영화의 메카 충무로에 따르면 이것을 효시로 1910년 경성부 황금정(黃金町, 현 외환은행 본점)경성고등연예관이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영화관으로 인기를 모았다.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의 적개심을 유화책으로 다루기 위해 충무로 일대에 영화관을 조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복 후에도 영화인들은 충무로에 모였고 그 무렵 충무로에 있던 대원호텔은 영화감독, 시나리오작가, 지방 흥행사들의 숙소로 언제나 북적였다. 충무로는 6·25전쟁 휴전 이후, 55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이 수도극장(스카라극장)에서 흥행에 성공하며 영화를 보러온 관객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춘향전은 개봉 2달간 12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그 후 1961년 명보극장(현 명보아트시네마)에서 개관한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전, 외화(外畵) 최고 흥행기록을 수립한 애수를 제치고 최고 흥행기록을 갈아치우며 충무로는 영화의 메카로 자리를 잡았다. 60년대엔 배우, 배우지망생, 감독, 작가 등 영화관련 업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꿈과 낭만을 안고 충무로 거리를 사시사철 누볐다.

그러나 반세기가 흐른 지금 충무로 거리엔 썰렁한 기운이 감돈다. 아직 녹지 않은 눈처럼 아련한 기억의 조각들만이 역사의 끝자락을 잡고 있다. 예전에 맹위를 떨치던 국도극장, 스카라극장 등은 이미 사라졌고, 명보극장과 대한극장은 멀티플렉스로 변신해 겨우 그 명맥을 잇고 있다. 40년 가까이 영화의 메카로 군림하던 충무로는 84년 외화수입개방, 88년 헐리우드 메이저 영화 직배 등으로 상황이 변해 갔다. 미국의 대형 영화 직배사 UIP 등이 들어와 강남에 자리 잡으면서, 영화산업의 중심이 서서히 강남으로 옮겨 간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메카였던 충무로가, 이곳을 아끼는 사람들을 주축으로 다시금 변신을 꾀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지금부터라도 혜안을 가진 사람들이 내일을 내다보며 힘을 모은다면, 이 거리가 한국영화를 추억하는 사람들의 발길로 활기를 되찾는 날도 그리 멀지 않을 것이다. 며칠 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이자 충무로의 큰별이었던 고() 신성일 선생이 영면에 들었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늦가을의 충무로를 다시 거닐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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