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지난 주말, 짧은 일정으로 오사카를 다녀왔다. 일제강점기, 어머니가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여학교 시절까지 머물렀던 나라. 그곳에 발을 디딜 때마다 늘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조금은 미묘하고 흥분된 감정의 변화를 나는 쉽게 감지하곤 한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지인의 안내로 도쿄와 더불어 일본의 2대 교통중심지인 오사카의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오사카에는 교토·나라 등 인근 도시에 비해 관광자원은 그리 많지 않으나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인 만큼 유적지가 많다. 오사카성(城)을 비롯,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의 하나인 시텐노사(四天王寺), 3대 민속제전의 하나인 천신제(天神祭)로 유명한 덴만궁(天滿宮) 등 사찰·신사(神社)가 주를 이루고 있다. 나는 주로 유적지들을 돌며 오사카가 품고 있는 그곳 특유의 깊은 향취를 느끼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저녁에는 130년 전통의 어느 료칸(旅館)에 여장을 풀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의 교토 도착 소식을 듣고 나고야에서 달려온 난잔대학(南山大學)의 야마다 쇼오지(山田昭司) 교수를 만나게 되었다. 수학을 강의하는 그는, 나의 누이가 경영하는 나고야의 한 음식점 오랜 단골손님으로 나와는 첫 만남이었다. 

일본인이지만 어쩐지 한국이란 나라에 마음이 끌려, 한글을 독학으로 깨우치고 한국 역사에도 조예가 깊다는 야마다 교수. 게다가 한국어도 곧잘 하는 특별한 분을 꼭 만나보고 싶다는 나의 바람이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나는, 준비해 간 시집에 사인을 한 다음 야마다 교수에게 정중히 선사했다. 이에 고마움의 표시를 한 그는 자신의 작은 가방을 천천히 연 뒤 책 한 권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내 눈에 책 제목이 확 빨려들어 왔다. 순간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국가의 품격(國家の品格)』이란 제목의 그 책은 오차노미즈(お茶の水) 대학 ‘후지와라 마사히코(藤原正彦)’ 교수가 쓴 것으로, 지난 2006년 일본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켜 한국에서도 그 번역본이 출간된 바 있었다. 

“김 시인께서도 이 책을 익히 아시겠지만, 저는 오늘 이 책보다는 이 책을 쓴 후지와라 마사히코 교수의 어머니에 대해 간단히 말씀 드리려 합니다.”

전혀 예상 밖의 제의에 나는 기꺼이 응하겠노라 답하고 잠시 흐트러졌던 자세를 가다듬었다. 한국어를 주로 구사하며 시작된 야마다 교수의 즉석 강의가 차분히 이어졌다.

후지와라 마사히코 교수의 어머니는 ‘후지하라 데이(藤原貞)’로 1946년에 출간된 『내가 넘은 38선』의 저자였다고 한다. 만주에 거주하던 그녀는 26세 되던 해 일본이 패망하자, 어린 아들 마사히코를 비롯, 세 아이를 데리고 필사적으로 만주를 탈출, 압록강을 건넜다. 그 책에는 한국의 38선을 넘기까지 겪은 시련의 과정이 담겨 있는데, 역경에 처했던 그들을 내 가족처럼 정성껏 보살펴 준 어느 한국 여인의 따뜻함이 그려져 있다고 야마다 교수는 역설했다. 

특히 후지하라 데이는 그 뒤로도 틈틈이 아이들에게 “조선 사람들은 궁핍한 처지에서도 패전국 국민인 우리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베풀어 주었다. 너희들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일러 주며 키웠다고 한다. 따뜻한 온정을 베풀어준 한국인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으려는 한 일본인의 심경이 잘 드러난 일화였다.   

야마다 교수는, “일본의 극우정치인들이 역사를 왜곡한 나머지 납득하기 어려운 발언을 종종 서슴지 않고 있다. 또한 독도 영유권도 끊임없이 외쳐대고 있지만 대부분의 양심적인 일본인들은 과거 역사의 옳고 그름을 잘 헤아리고 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 달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멀고도 가깝다는 나라 일본. 오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숙명적인 관계를 이어온 나라. 지나온 역사의 명암을 뚜렷이 가려내는 일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동북아 시대를 주도해 나가야 할 우리가, 과연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할 것인가는 비단 정치인들만이 풀어야 할 숙제는 아닐 것이다. 

귀국길, 동해 상공을 날며 타국에서 접한 ‘은혜’와 ‘양심’이라는 단어를 나는 천천히 떠올렸다. 그러자 어느덧 행복감으로 바뀐 두 단어가 나의 가슴속으로 뜨겁게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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