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최근 구청에 들러 서류를 작성하던 중 아내의 전화번호를 적는 난에서 기억이 가물거린 적이 있다. 나의 스마트폰 속에 아내의 번호를 즐겨찾기로 설정한 뒤 원터치 기능만 쓴 때문인지 어느덧 머릿속에서 잊히고 있었던 것이다. 평소 기억력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자부해온 나로서는 작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즉시 즐겨찾기의 기능을 해제하고 아내의 전화번호를 기억 속에서 재각인시켰다. 매스컴에 종종 오르내리는 ‘디지털 치매’가 나에게도 닥친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불쑥 일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내가 속한 문학회의 어느 선배 시인은 칠순이 임박했음에도 왕성한 기억력이 늘 자랑거리다. 시낭송회에서 시인들 대부분이 인쇄물을 보면서 낭송하는 데 비해 이 분은 자작시를 모두 외운 상태에서 적절한 율동까지 가미, 암송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귀찮다는 이유로 동료 문인들이 잘 시도하지 않으려는 암송을 행사 때마다 시도, 뜨거운 박수세례는 늘 그분의 독차지가 되곤 한다. 

이처럼 우리의 두뇌는 끊임없는 반복과 노력이 이어지면 기억력이 더욱 향상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요즘처럼 디지털 기기의 편리함에만 의존하면 단순한 전화번호마저도 기억하지 못하는 황당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른바 디지털 치매로 접어드는 것이다.

치매(dementia)라는 말은 라틴어의 'de(아래로)'와 'mens(정신)'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정신이 추락하는 것 즉, '정신이 없어진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치매는 정상적으로 생활해 오던 사람이 다양한 원인으로 뇌기능이 손상되면서 일상생활에 상당한 지장을 초래하는 상태를 일컫는다.

예컨대 절친한 사람의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한다든지, 노래방 반주화면의 가사 자막 없이 부를 줄 아는 곡이 거의 없다든지, 손글씨보다 키보드나 휴대폰 문자판이 편하다든지 하는 여러 가지 현상이 있다. 최근 들어 이러한 경험이 하나라도 있다면 디지털 치매증후군을 의심해 봐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특히 이 증상이 장기간 이어질 경우 기억이 사라지는 치매로 진전될 가능성은 언제든지 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지난 2013년, 독일의 유명 뇌의학자 ‘만프레드 슈피처’가 쓴 『디지털 치매』가 국내에서도 출간되어 관심을 모은 바 있다. 방대한 분량의 자료와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의료인과 교육자, 정치인뿐 아니라 일반인이 이 병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고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예방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쓴 책으로 ‘디지털 기기 사용에 관한 충격 보고서’ 형태를 띠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의 여러 부분에서 특히 한국의 상황을 언급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미 2008년 무렵부터 기억력 장애와 주의력 결핍 장애, 집중력 장애는 물론, 감수성 약화를 겪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점점 늘고 있었으며 이러한 질병 양상을 한국의 의사들이 디지털 치매라 불렀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각종 디지털 매체의 공격으로부터 나와 가족의 뇌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떤 대응이 필요할까? 저자는 이 책에서 “가능한 한 영상매체, 비디오 및 컴퓨터 게임, 지속적인 온라인 이용을 멀리하는 것이 좋다. 음악과 스포츠 활동을 하고, 가족이나 친구들을 통해 유대감 있고 의미 있는 활동을 하라. 특히 유아와 어린이, 청소년의 경우, 수많은 연구 결과를 볼 때 스마트보드나 노트북 등은 공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손가락을 꼽으며 수를 배우고 몸을 움직여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학습과 건강에 훨씬 효과적이다.”라며 아날로그적인 처방을 내놓고 있다.

디지털 치매증후군이 생명을 위협할 만큼의 위험한 증상은 아니라 할지라도 스트레스를 유발시키고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 원인 가운데 하나라는 점에서는 그대로 방치할 수 없다. 삶의 질과 정서를 높이기 위해서라면 이제부터라도 가급적 디지털 미디어를 멀리하고 자연에서 보내는 시간을 늘려 가는 삶의 지혜를 펼쳐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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