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일제강점기의 압제를 피해 만주로 이주, 그곳에서의 각박한 체험을 시로 승화시켜 가던 청마(靑馬) 유치환(柳致環)은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됐다. 그리고 같은 학교에 근무하던 시조시인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를 연모하게 된다. 청마의 나이 38세였다. 그는 간절한 그리움을 시로 담아내며 숱한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의 동생이기도 한 이영도는 남편과 사별한 채 딸 하나를 기르는 아름다운 30대 초반의 교사였다. 그러나 그녀는 당시 유부남이었던 유치환의 사랑을 쉽게 받아 주지 않았다. 유교적 가풍의 전통적 사고방식이 투철했던 이영도였다. 그럴수록 이영도를 향한 사랑의 마음은 더욱 굽이쳤지만 그 마음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유치환의 짝사랑은 시름이 더욱 깊어만 갔다.

그의 시 ‘행복’은 이영도를 향한 애절한 마음을 표현한 시라고 전하는데, 훗날 이영도는 유치환의 열렬한 사랑의 마음을 받아들여 둘은 서로의 문학세계와 삶에 정신적인 의지처가 되었다고 했다. 1946년 『죽순』이란 시동인지를 통해 만나 활동하던 두 사람은 그리운 사연을 적은 편지를 통해 20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정신적인 사랑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사랑은, 유치환이 이영도에게 보낸 5,000여 통의 사랑의 편지 중 200통을 추려 모은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에 절절히 기록될 정도로 아프고도 애틋했다.

통영 중앙동우체국 정문 계단 옆에는 빨간 우체통과 나란히 ‘행복’ 시비(詩碑)가 있다. 이곳에서 유치환은 ‘에메랄드빛 하늘’을 쳐다보며 이영도에게 순결한 사랑의 메시지를 보냈다. 

언제부턴가 정갈하게 깎은 연필이나 펜으로 꾹꾹 눌러 써 보내던 ‘편지’가 죽었다. 길거리에서는 빨간 우체통의 모습도 차츰 자취를 감추고 있다. 유선전화기로 안부를 묻고 전하던 시대는 이미 오래전의 이야기이고 이제는 압축된 휴대폰 문자메시지 몇 자로 안부를 대신하며 각종 정보도 교환한다. 세상이 편해졌다고들 한다. 그에 걸맞게 ‘이메일’을 쓰는 속도도 빨라졌다. 갈수록 메시지의 내용도 짧아지고 있다. 그런 만큼 인간의 기본 정서마저도 서서히 메말라 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통신수단이 미흡했던 시절, 편지는 우리들이 전하고 싶은 감정을 마음껏 옮길 수 있는 편리한 수단이었다. 사랑하는 연인에게 차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나 친구 사이의 돈독한 우정 표현을 하얀 편지지 위에 절절히 옮기면, 가슴 속에서 차오르는 뿌듯함에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몰랐다. 언어 표현의 한계를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해 훌륭히 꽃피우던 시절의 아련한 추억은 아직도 나의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 편지는 얼굴을 마주하고 차마 꺼내지 못하는 마음 속 깊은 곳의 감정을 자연스레 털어놓게 했고 쉽게 전하지 못하는 희로애락의 감정 표현을 고스란히 담을 수 있게 해 주었다.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변하는 바쁜 현실 속에서 갈수록 대화의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가족이나 친척, 친구나 이웃, 또는 직장 동료 간에 서로 얼굴을 맞대고 마음을 나눌 여유로움을 잃어 간다는 얘기다.

희망찬 기해년 (己亥年)의 새 아침이 밝았다.

오늘만큼은 이메일의 창을 닫은 다음 마음의 창을 활짝 열고 묵혀 두었던 편지지를 꺼내자. 그리고 평소 사랑하고 아끼던 사람을 향한 아름다운 메시지를 정성스레 적은 다음, 단아한 우체국 계단을 사뿐히 밟아 봄은 어떨까.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중략)…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유치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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