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몇 해 전, 독일의 대표적 시인이자 희곡 작가인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 개정 작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국내에서는 1989년까지 사회주의자라는 명목으로 금서(禁書) 조치되었다가, 해금된 뒤로는 뛰어난 서정 시인으로 사랑을 받아온 브레히트의 시모음집이다. 그런데 현대 시문학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그의 작품들을 살피던 중, 유독 ‘민주적인 판사’라는 제목의 시가 가슴에 깊이 와 닿았다. 그 시의 전문을 소개하면 이렇다.

‘미합중국 시민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심사하는 로스앤젤레스의 판사 앞에 이탈리아 식당 주인도 왔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새 언어를 몰라 시험에서 보칙(補則) 제8조의 의미를 묻는 질문을 받고 머뭇거리다가 1492년이라고 대답했다/ 시민권 신청자에게는 국어에 대한 지식이 법으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그의 신청은 각하되었다/ 3개월 뒤에 더 공부해서 다시 도전했으나 새 언어를 모르는 장애는 여전했다/ 이번에는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이 누구였는가 하는 질문이 주어졌는데,(큰 소리로 상냥하게 나온) 그의 대답은 1492년이었다/ 다시 각하되어 세 번째로 다시 왔을 때, 대통령은 몇 년마다 뽑느냐는 질문에 그는 또 1492년이라고 대답했다/ 판사는 그가 마음에 들었고 그가 새 언어를 배울 수 없음을 알아차렸다/ 그가 어떻게 살아가는지 조회해 보니 노동하며 어렵게 살고 있음이 드러났다/ 그가 네 번째로 나타났을 때 판사는 그에게 언제 아메리카가 발견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리하여, 1492년이라는 그의 정확한 대답을 근거로 그는 마침내 시민권을 획득했다’

1898년 독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한 제지공장 직원의 아들로 태어난 브레히트는 16세부터 시와 평론을 썼다.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자, 덴마크, 핀란드 등을 거쳐 1941년에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43년 미국에서 씌어진 이 시를 보면 그의 미국 생활이 녹록치 않았음이 엿보인다. 낯선 곳에 잘 적응하고 싶다는 욕망은 가득해도 현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1492년은 콜럼버스 일행이 아메리카 대륙에 첫 발을 디딘 해로 판사의 선조들도 원주민의 말을 한 마디도 못하던 때였다. 그러니 이탈리아 식당주인의 고된 사정을 이해해 줘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판사’와 ‘민주적’이라는 단어는 정, 따뜻함, 인간미와는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이 시 속의 판사에게서는 왠지 위트와 인간미가 느껴졌다.

법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이 시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라는 생각으로 개정 작업을 마무리하던 그때를 떠올리자 문득 효봉(曉峰) 스님이 뇌리를 스쳐간다. 일제 강점기 조선인 최초의 판사(속명·이찬형)였던 스님은 법복을 입은 지 10년, 평양 복심법원(현재의 고등법원)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동포에게 첫 사형 선고를 내린 뒤 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고뇌한다.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방황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마침내 ‘법복은 출세와 영광의 상징이 아니라 양심을 옥죄는 번뇌의 쇠 그물’이라는 결론을 얻기에 이른다. 그의 위대한 버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법관직을 버린 그는 곧바로 처자식을 둔 채 가출(?), 엿장수를 하며 전국을 떠돌기 시작한다. 3년 동안 떠돈 뒤 금강산 신계사에서 머리를 깎고 원명(元明)이란 법명을 받았다. 서른여덟의 나이였다. 이후 토굴을 파고 필사적인 정진(精進)을 하는 등 피눈물 나는 자신과의 싸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훗날 한국불교 통합종단의 초대 종정으로 추대되어 많은 업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2019년 희망찬 새해가 밝았으나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의 정점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구속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7개월 넘게 전·현직 법관 100여명을 조사한 검찰이 양 전 대법원장에게 적용한 혐의는 40여 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준엄한 법의 심판에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어쩌다 사법부의 위상이 이렇게까지 추락했는가 하는 심정에 그 참담함을 금할 수 없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법조계는, 법률을 다루는 고위 법관의 처신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다시금 뼈아프게 고뇌하고 반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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