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을 앞두고 자치단체가 연 직거래장터. 본문과 관련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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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관예우의 ‘두 얼굴’

자동차 외장용품을 생산하는 인천의 한 중견업체 팀장급인 A씨. 그는 요즘 하루하루가 괴롭다. 바로 위 상사 때문이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상사와 다투거나 신경전을 벌이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다. “설 연휴 전날에도 좀 심하게 말다툼을 벌였다”고 한다.
A씨의 상사는 작년까지 국내 메이저 자동차 기업 중 한 군데인 B사에 다니다, 이 회사로 옮겨왔다. 옮겨왔다기보단, 구조조정 와중에서 ‘잘렸다’는 표현이 맞다. 이른바 ‘전관예우’의 기대를 받고 B사의 1차 하청업체인 A씨의 회사 임원급으로 영입된 것이다. 그가 하는 일은 원청사인 B사와의 창구 역할을 하고, 안정적인 일감 수주와 영업을 책임지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예전에 B사 있을 때 ‘갑질’ 행태가 몸에 배선지 우리 회사 시스템이나 사람들을 우습게 볼 때가 많다”는 A씨의 얘기다. 그래서 사사건건 부딪치곤 한다.
자동차 산업의 불경기가 장기화되면서 현대․기아, GM, 쌍용, 르노삼성 등 메이저사 출신 간부들이 대거 1차, 2차 하청업체 고위 관리자나 임원으로 옮기는 경우가 이젠 상식이 되고 있다. 문제는 이렇게 옮겨온 이들의 ‘수명’이 짧다는 점이다. 전에 몸담았던 원청사와의 관계가 유지되는 ‘전관예우’의 유효기간도 길어봐야 2년 가량이다. 2년이 지날 즈음엔 ‘쓸모없는 퇴물’이 되어 그나마 취업한 협력업체에서도 떠나야 한다. 더욱이 A씨의 사례에서처럼 원청사와는 다른 협력업체의 조직문화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A씨는 자신과 불화를 겪는 상사 역시 “수명이 얼마 안 남았다”고 한다. “여러 사람(메이저사 출신 간부)들이 입퇴사를 반복하면서 회사도 이젠 국내 메이저사 일은 30~40%만 하고, 나머지는 대부분 수입차와 관계된 일감으로 돌렸다”는 A씨의 얘기다. A씨는 작년부터 그랬듯이, 금년에도 긴 설 연휴를 모두 쉬었다. 좋긴 하지만, 이래저래 마음은 편치않다.

#2. 비정규직과 대학원

“아무리 봐도 언제까지나 비정규직으로만 돌 순 없었어요. 3년 동안 근무했던 계약직 팽개치고 다시 대학원 진학했습니다”
김은정씨(가명․32)는 설 연휴 직전 다니던 모 의과대학 연구․사무직을 그만 두었다. 교수 연구실에서 보조업무를 하며 사실상 일반 교직원과 똑같은 업무를 했던 김 씨는 그러나 2년 간 임시직(인턴)생활을 거쳐 작년부터 계약직으로 승급(?)했다. 평소 성실한 김 씨를 좋게 본 교수는 “책임지고 진로를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교수 자신이 따로 병원을 차려 학교를 그만두기로 하면서, 그나마 희망도 사라졌다. 
이참에 김 씨는 평소 생각만 했던 유전자데이터 관련 공부를 더 하기로 하고, 모 대학원에 응시했고, 지난 달 합격통보를 받았다. 설이 다가오던 지난 주 과감히 사표를 낸 김 씨는 “시원섭섭하지만 불안하긴 하다”고 했다. 설날 고향에 갔던 김 씨를 기다리는 건 걱정하는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이었다. 특히 9순이 넘은 할머니는 “내 손녀 언제 시집갈거냐”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심란한 맘에 김 씨는 딱 하룻밤 자고 올라왔다. 이제 서둘러 출근할 일도 없어졌지만... 


#3. 레미콘 노동자의 설

국내 굴지의 레미콘 회사에 다니는 K씨는 설 연휴 끝나는게 두렵다. 이미 작년부터 자의반타의반으로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곧 본격적인 구조조정이 있을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게 연휴 직전이었다. 
문제는 납품처가 날로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다행히 부산 남구와 북구 일대의 대규모 재개발사업이 진행 중이고, 다른 지방에서도 건설공사가 적지 않지만 그것으론 부족했다. 수도권이 정작 부진한게 문제다. 서울의 경우 대규모 재개발, 재건축 사업이 부동산 경기 위축으로 취소되거나 축소되었고, 그 바람에 레미콘 예약이 취소되는 등 수요도 크게 줄었다. 
“3기 신도시는 당장의 어려움을 해결하기엔 시간이 너무 걸린다”는 K씨는 “이런 거래 부진은 본사 뿐 아니라 전국 공장들이 다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한 후 변함없이 이 회사에만 30여 년 근무해왔다. 하지만 설 연휴 끝난 후 그 세월이 끝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그래서 이번 설은 그에게 여느 때보다 각별한 명절로 기억될 법하다.


#4. 전굽는 냄새 

“동네에서 전굽는 냄새가 별로 안 나요. 특히 아파트 단지는 더 그런 것 같아요. 요즘은…”
경기도 의정부에 사는 주부 H씨는 설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하지만 결혼해서 분가한 자녀들이 올 때를 대비해서 늘 설을 앞두곤 분주하게 전도 굽고, 나물반찬과 찌개와, 갖가지 해산물 요리에 매달리곤 했다.
그러나 금년엔 전이나 밑반찬을 따로 안 만들었다. 대신에 웬만한 건 이웃 반찬가게에서 모두 마련했다. 하긴 H씨뿐 아니다. 이런 모습은 특히 핵가족과 1인가족이 늘고, 베이비부머 세대들의 자녀가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더욱 심해졌다. 굳이 차례를 격식있게 치러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이는 이제 변화된 설풍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H씨는 “떡집말고도, 언젠가부터 설날이 되면 반찬가게가 불티난다”고 했다. 

#5. 영구임대아파트에 붐비는 고급차량

부산의 한 영구임대아파트. 지하주차장이 없는 이곳은 설이나 명절이 되면 아예 단지 안에서 주차할 공간을 찾는게 불가능하다. 대부분 어르신이나 몸이 불편한 고령층이 많이 사는 이 아파트의 세대 규모는 13~17평 안팎이다. 입주민 중에는 독거 어르신들도 많다.
평소 낡은 타이탄 트럭이나 소형차가 대부분이었으나 이날 만큼은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명절 때만 되면 이곳은 모처럼 찾아든 방문객들로 북적인다. 외지에 나가있거나 따로 사는 자녀들과 친척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아파트 단지 안팎은 온갖 차종의 차량들로 하루 종일 북새통을 이루는데, 그중 대부분은 중형급 이상 세단이거나, 3천CC 이상 대형차들이다. 더욱이 상당수는 억대를 넘는 고급 수입차들이다. 지은지 20여 년이 넘은 영구임대아파트의 허름한 외관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고급 차량들이다. 
“그렇게 잘 사는 자식들이라면, 부모를 이런 곳에 살게 해선 되느냐”는 얘기도 나올 만 하지만 이곳 아파트 경비원 C씨는 생각이 다르다. “나이 들어서 굳이 관리비 많이 나오고, 청소하고 가꾸기도 힘든 넓은 아파트에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다. 
비단 이곳 뿐 아니다. 주로 고령층이나 독거 어르신들이 많이 사는 소형 임대아파트에선 이런 광경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런 세태와 삶의 방식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때가 또한 설 명절이다.

우종선(객원기자) ․ 김예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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