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10년이 더 지났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싱싱하여야 할 젊은 나이다. 남편은 내가 상상한 것과 같이 일본 사람도 아니고 미국 사람도 아닌, 그리고 진주군(進駐軍) 장교(將校)라는 것을 뽐내는 것 같은 사나이였다.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 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피천득 ‘인연’ 중에서)

내가 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시절,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던 이 수필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인연’을 포함한 짧은 수필 35편을 담은 『수필』이라는 책이 처음 출간된 것은 지난 1976년이었다. 이후 1996년, 책의 제목을 『인연』으로 바꾸어 펴낸 지도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아직도 서점가에서는 이 책을 찾는 독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 글은 인연에 얽힌 선생의 아름다운 회상이 깔끔하게 표현되어 있다. 1973년 『수필문학』을 통해 발표되기도 했었는데 이야기 전개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어 마치 한 편의 콩트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글의 도입부분은 춘천 성심여대의 출강, 본문은 지난날의 회상, 끝부분은 만남과 인연을 생각하는 현재로 다시 돌아오는데 회상 부분에는 도쿄에서 문학 소녀 ‘아사코’를 만나고 헤어진 뒤의 20년 세월이 정교하게 압축되어 있다.

수십 년에 걸쳐 세 번 만난 인연을 아름답고 담담하게 들려주고 있는 이 작품은 이러한 정감어린 의미 전개가 곧 제목인 ‘인연’과 맞닿아 있으며,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는 끝 부분에서는 ‘아사코’에 대한 그리움을 간접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일생 동안 숱한 인연에 얽매어 울고 웃으며 희로애락에 젖는다. 국어사전에서는 인연을,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 또는 어떤 사물과 관계되는 연줄’로 풀이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인(因)과 연(緣)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곧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과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으로 해석한다.

또한 옷깃만 살짝 스쳐도 인연이라고 보는 불교에선 인연을 겁(劫·Kalpa)이라는 시간 개념으로 가정한다. 즉, 겁이란 셀 수 없이 긴 시간을 뜻하는 은유적 표현인데 천지가 한 번 개벽하고 다음 개벽이 시작될 때까지의 시간으로, ‘100년에 한 번씩 내려오는 선녀의 옷자락이 사방 40리의 바위를 닳아 없애거나, 1,000 년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낙숫물이 집채만한 바위를 뚫거나, 사방 40리의 철성(鐵城)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100 년에 한 알씩 꺼내 다 비워 질 때까지’의 기간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겁의 개념을 바탕으로 ‘같은 나라에 태어나는 것은 1,000 겁에 한번 꼴, 하룻길을 동행하는 것은 2,000 겁에 한번 꼴, 하룻밤 함께 묵는 것은 3,000 겁에 한번 꼴, 부부로 맺어지는 것은 8,000 겁에 한번 꼴, 형제로 만나는 것은 9,000 겁에 한번 꼴, 부모나 스승으로 모시게 되는 것은 10,000 겁에 한번 꼴’이라 하니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만남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인연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한다.

나는 80년대 초 어느 날 아침, 우연히 접하게 된 모 일간지 사원모집 광고가 인연이 되어 상경한 이후 30년을 훌쩍 넘기며 서울에 머물러 살고 있다. 취업을 앞둔 터라 옆집에서 구독하던 신문을 잠시 빌어 본 것이 나의 인생을 결정지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무심코 본 신문이었지만 7,000 겁 정도의 장구한 세월 끝에 닿은 인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신문,『애플경제』와의 인연이 새롭게 찾아와 칼럼을 쓰고 있으니 나와 신문과의 인연도 참으로 끈질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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