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의 시선으로 본 제4차산업혁명

과학기술은 태생적으로 도구적 이성의 산물이다. 다가올 디지털경제와 디지털 기술은 특히 그럴 개연성이 크다. 애초 디지털 기술로의 변이 과정 자체가 존재로서 인간의 가치를 숙고하기보단, 소유의 대상으로서 만물의 효율적 진화를 탐구한데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융합’이란 이름으로 시도되고 있는 학문적 탈경계 움직임도 그런 점에서 달리 볼 소지가 많다. 나노 ․ 바이오 ․ 정보통신, 인지과학의 융합을 시도하는 NBIC(Nano-Bio-Information Technology. Cognitive Science)에서 보듯, 인문학적 궁리(窮理)와의 교집합적 섞임보단, 파편화된 학제적 시너지(synergy)에 의한 무개념의 도구주의를 맹신하는 경향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과학기술은 ‘객관적이지 않는가’라는 반문이 가능하다. 과연 그럴까. 과연 과학기술은 완전무결하게 가치중립적인 도구인가? ‘왜?’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필요없어도 될 만큼 충실하고 객관적인 수단인가? 따지고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말이 좋아 ‘객관’이지, 실상은 조작된 정의나 윤리를 삼간다는 미명하의 유물론적 관점에 스스로를 가두거나, 가치중립이 아닌 몰가치적인 인과론에 얽매이곤 한다. 문제는 그로 인한 과학기술의 인식론적 리스크다. 반(反) 인문적 몰가치화가 편향된 가치를 부르고, 그로 인해 사회 ․ 문화적 역기능을 유발하는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다. “과학이 제 아무리 가치중립성을 견지한다고 하나, 어떤 가치에도 경도되지 않은 객관적 사실을 발견한다는 것은 허구”라는 인류학자 브뤼노 라투루의 말이 와닿는 대목이다.

이러한 인식론적 리스크는 현실의 문제나 사회적 모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퇴화를 불러오거나, 몰가치적 권력과 체제에 대한 반성과 저항의 여지를 빼앗는 사회윤리적 리스크로 전환되곤 한다. 한나 아렌트가 홀로코스트에 대거 가담했던 평범한 인간들을 두고 ‘악의 평범성’을 개탄한 것과 같다. 인문적 가치나 사회적 존재의식과는 무관한, 연구와 개발만을 능사로 한 고립된 영역에 머무를수록 그런 리스크는 더욱 커진다. 가치중립이라기보단, 편벽한 집착이나 무능력한 편견에 사로잡히고, ‘가슴’이 없는, 회색빛 뉴런이 지배하는 기술만을 양산할 뿐이다. 근래 ‘융합’이란 이름으로 과학기술의 방법론적 차원을 달리 한다곤 해도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앞서 말한 NBIC 융합의 경우 애초 공학적 연구를 바탕으로 한 것이므로, 학문적 스탠스 자체가 무척이나 기능적이며, 존재에 대한 질문이 표백되어 있다. 그렇다 보니 말만 ‘융합’일 뿐, 모든 것을 나노 수준의 물질로 수렴, 치환, 조작할 수 있다는 유물론적 환원주의에 기반하고 있다. 과학과 인문정신이 하나되는 ‘융합’이 아니라, 오로지 물질과 기술을 향한 탈인문적 ‘수렴’일 뿐이다. 무릇 본래의 융합은 가치지향적 성찰과 비판의식을 학문적 생명으로 여기는 인문학과의 협력이다. 물질 만능의 경제성장이 아니라, 문화의 질적 발전을 배려하는 성장에 기여하는 성찰의 실천이며, 서로 다른 영역 간의 ‘수렴’이 아닌, 협력적 연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 문명기의 초입에 접어든 지금, 그와 같은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협력적 연구는 축소되거나 추방되고 있다.

그런 비(非)존재론적인 도구주의는 급기야 ‘신과 흡사한 인간’을 꿈꾼다는, 인류사적 일탈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른바 테크노퓨처리즘이니 트랜스휴머니즘이니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이는 ‘인간이 원하는대로 어떤 후천적 인간형이든 만들어낼 수 있다’는 기술지상주의에서 발원된 우생학적 야만이며, 나치의 인종개량 프로젝트의 21세기 버전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 ‘오만한 미래’에선 인간성의 근원에 대한 추구나, 삶의 본질과 진리에 대한 탐구 따윈 가볍게 취급된다. 심지어 지속 가능한 문명의 필요조건이라고 할, 지식과 집단 지성, 선명한 생존의지마저 약화된다. 곧 펠릭스 가따리가 말한 주체성 자본까지 소멸되는 것이다. 하물며 휴머니즘이니, 민주주의니 하는 인류 본연의 가치는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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