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서슬이 시퍼렇던 일제강점기. 바로 그 암울했던 시절에 온몸을 던져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유관순 열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가슴 절절한 유언은 이렇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지난 2014년 2월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에서는 의미 있는 한 영화의 시사회가 있었다. 권순도 감독이 제작과 연출을 맡았던, ‘소녀의 기도’라는 제목의 그 영화는 유관순 열사를 기리는 다큐멘터리로 일본 시마네현이 주최하는 ‘다케시마의 날’ 행사 하루 전에 상영되었다. 

총 41분 분량의 그 영화에는 유관순 열사의 삶과 3․1 운동 발발 배경 및 과정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또한 유관순 열사의 친구들이 생존해 있을 때 그의 일상에 대해 증언하는 모습과 조카며느리인 김정애 씨의 증언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게다가 유관순 열사와 함께 감옥에서 생활을 했던 스승 박인덕 선생의 육성증언은 더욱 눈길을 끌었다.

특히 영화가 상영된 그 무렵엔 한국사 교과서 서술 내용을 둘러싼 불협화음의 후유증이 채 가라앉지 않았던 터라 관람하는 내내 나의 심정은 그저 착잡하기만 했다. 특히 일부 교과서에서 유관순 열사에 대한 언급 자체가 아예 누락된 사실이 드러난 바 있어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가누며 시사회장을 나서야 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7개월의 시간이 흐른 시점에서 유관순 열사에 대한 보도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논란도 그림자처럼 뒤따랐다.

그 논란 가운데 가장 핵심은 그해부터 고교에서 필수로 배우고 있는 한국사 교과서 8종 가운데 4종이 유관순 열사를 다루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교과서를 채택한 고교가 전체의 60%이며, 나머지 4종 가운데 2종의 교과서도 간략한 사진 설명만으로 유관순 열사의 애국활동을 다룬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그 무렵 김정인 춘천교대 교수는 교육부 주최 토론회에서 상당수의 역사 교과서가 유관순 열사에 대한 기술을 누락한 것에 대해 “유관순은 친일 경력이 있는 박인덕(이화 여전 선배)이 해방 후 발굴해 영웅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해 논란이 더욱 증폭된 바 있다. 이에 맞서 고려대 홍후조 교수는 “집필자들이 유관순 열사를 모를 리 없는데 유관순 열사를 뺀 것은 집필자의 편향된 역사 인식을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이처럼 역사학계의 전문가들마저 역사 인식의 양극화를 드러내는 심각성을 보였던 것이다.  

김정인 교수의 발언에 대한 사회 각계의 항의가 빗발치자 며칠 뒤 김 교수는 유관순기념사업회 측에 사과문을 보내 “유관순은 친일파가 만든 영웅”이란 발언을 죄송하게 생각하고 사죄드린다며 서둘러 사태 수습에 나섰지만 그 논란의 뒷맛은 영 개운치가 않았다.

그 무렵 김정인 교수의 돌출 발언에 대해 이정은 3·1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은 “3,000명이 참여해 19명이 희생된 아우내장터 3·1 만세운동을 유관순 열사가 주도하고 감옥에서 고문을 받아 숨진 것은 변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반박하고 “유관순 열사를 폄훼하는 것은 역사 왜곡”이라고 비판했다.  

유관순 열사가 아우내 장터에서 주도한 만세 시위 사건 기록과 경성재판소의 판결문 기록, 그리고 서대문형무소 복역 기록, 사진 등은 인터넷에서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일부 학자들이 이를 눈감은 채 과장된 인물인 양 매도하며 고교 교과서 집필에 참여했다는 사실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한국의 미래를 열어 나갈 우리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의 기술(記述)은 역사적 진실이 우선되어야 한다. 앞으로 좌편향이든 우편향이든 간에 편향된 시각을 가진 역사학자의 교과서 집필을 막을 수 있는 특단의 대책이 뒤따라야 함을 교육부는 늘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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