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기형도 ‘빈 집’)

한국문학에는 유난히도 요절한 문인이 많다. 이달에는 춘천 ‘김유정(金裕貞) 문학촌’에서 서른에 요절한 김유정을 기리는 추모제가 열린다. 김유정의 구인회 동료였던 이상(李箱)은 김유정이 세상을 떠나자, 마치 벗의 뒤를 따르듯 스무 날 뒤에 눈을 감았다. 이상의 기일로부터 겨우 닷새 뒤에는 역시 요절 작가인 김소진(金昭晋)이 세상을 떠났다. 

이 외에도 ‘요절의 한국문학사’라도 써야 할 만큼 여러 문인들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죽음의 원인이야 서로 다르다 해도, 시절의 아픔이 몸과 마음의 병으로 바뀐 게 아닐까 하는 공통된 추측이 차츰 관심을 모으고 있다. 게다가 하필이면 만물이 기지개를 켜는 봄에 이들의 기일이 몰려 있어 묘한 느낌도 갖게 한다.  

광명시에서도 또 한 사람의 요절 문학인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다. ‘기형도(奇亨度) 시인  추모 문학제’다. 젊은 시절부터 유달리 고인의 작품세계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도 추모 행사에 늘 함께하고 있다. 1960년생인 기형도는 1989년 3월 7일 새벽, 종로 파고다 극장의 한 좌석에서 뇌중풍으로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시퍼런 스물아홉이었다. 

광명시민회관에서 열리는 추모 문학제는 시인을 기억하는 친우들의 회고와 그의 시를 사랑하는 작가들의 낭송 및 공연이 어우러진 가운데 잔잔하게 진행된다. 문학제의 시작과 함께 시인의 어머니인 장옥순 씨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담은 영상과 시인의 생전 사진을 담은 영상이, 객석을 그리움과 숙연함으로 물들게 한다.

광명시는 시인이 어린 시절부터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여러 작품 속에는 그가 살았던 70~80년대 광명시의 풍경과 정서가 묻어 있다. 시인은 죽음과 상실의 이미지를 탐닉하고, 환멸의 시대를 검은 허무주의로 써내려간 유작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한 권 만으로 ‘기형도 신드롬’을 만들었다. 그리운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추모의 밤 행사장은 언제나 후배 문인들과 팬들로 빼곡히 채워진다. 

1969년 정초, 기형도의 아버지는 뇌중풍으로 세상을 떠났다. 기울어진 가계를 어머니가 꾸리는 가운데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신림중학교 3학년 때 바로 위의 누이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큰 아픔이 닥쳤다. 그는 이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다.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그는 198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뒤 이듬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로 등단한다.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던 그는 고통 속에서 시를 쓰며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는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덧붙여 이렇게 기록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했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눈이 쏟아질 듯하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의 손에는 출판사에 보내야 할 시 한 편이 들려 있었다. 그가 보고자 했던 첫 시집은 유고 시집이 돼버렸다. 그는 1980년대 이후 시를 꿈꾸는 모든 문학청년의 질투와 부러움을 한 몸에 샀다. 청춘의 불안을 우울하게 노래하되 현실을 뛰어넘는 환상의 미학까지도 펼쳐 보인 덕에 시인 지망생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시인이 남긴 단 한 권의 유고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은 지금까지 30만부나 넘게 판매되는 기록을 남겼다. 기형도 시인의 30주기를 맞아 그가 남긴 시들을 다시 읊조리며, 영원한 청년 시인의 이름 석 자를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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