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 차(此)로써 세계만방(世界萬邦)에 고(告)하야 인류평등(人類平等)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此)로써 자손만대(子孫萬代)에 고(誥)하야 민족자존(民族自存)의 정권(政權)을 영유(永有)케 하노라.’(‘기미독립선언문’ 중에서)

1920년 2월,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은 문하인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을 앞세워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창설, ‘동국통감’ ‘율곡전서’ ‘삼국사기’ 등 고전 간행에 힘썼다. 선조들의 정신이 담긴 책을 간행, 보급하는 일이야 말로 나라를 빼앗긴 백성이 민족혼을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갈수록 극에 달하자, 백암은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한다.

그때 육당의 나이 열아홉. 백암과의 이별 앞에서 그는 뜨거운 눈물을 뿌렸다. 백암이 떠난 뒤에도 육당은 서지 출판에 꾸준히 전념, 300여 종의 우리 고전을 복간하고 최초의 우리말 사전인 ‘말모이(큰사전)’를 편찬한다. 전국 각지에서 지식인 수백 명도 조선광문회로 모여들었다. 혈기왕성한 지식인들에게 조선광문회는 고전 간행을 핑계로 자연스럽게 모여 시국에 관한 생각들을 나눌 수 있는 고급 만남의 장(場)이었다. 이곳에 있는 외국 신문이나 간행물 등을 통해 이승만·안창호 등의 구미(歐美) 독립운동 상황,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론 등을 알게 된 지식인들은 자연히 항일운동을 꿈꾸게 됐다. 

마침내 1919년 2월, 천도교·기독교·불교의 지도자들은 민족적 거사를 도모하게 된다. 독립선언서의 작성은 천도교 측의 독립선언서 원고 지침에 따라 최남선이 기초했다. 인쇄는 천교도 측이 맡았는데 27일 밤 보성인쇄소에서 2만 1천 장을 인쇄, 전국 주요 도시에 은밀히 배포했다. 

드디어, 3월 1일 오후 2시 무렵 민족대표들은 인사동 태화관(泰和館)에서 주인 안순환으로 하여금 조선총독부에 미리 전화를 걸게 하여 이곳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며 축배를 든다는 사실을 알렸다. 이어 출동한 일본 경찰이 포위한 가운데 한용운(韓龍雲)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고 나머지 민족대표들이 제창한 뒤 일본 경찰에 연행되었다.

한편, 탑골공원에서는 이날 민족대표들이 나타나지 않아 군중들이 혼란에 빠지자, 5천여 명의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정재용(鄭在鎔)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뒤 시위에 나섰다.

탑골공원은 탑공원·탑동공원·파고다공원이라고도 불리던 서울 최초의 근대 공원으로 1991년 10월 25일 사적 제354호로 지정되었다. 1992년에 와서야 옛 지명을 좇아 정식 명칭을 탑골공원이라 정했다. 고려시대에는 흥복사(興福寺), 조선시대 전기(1464)에는 원각사(圓覺寺)가 그 자리에 있었는데, 연산군이 원각사를 없애고 중종 때 건물이 모두 헐리면서 빈터만 남아 있다가, 1897년 영국인 고문 J.M. 브라운이 설계해 공원으로 꾸며졌다.

팔각정을 중심으로 원각사지 10층 석탑(국보 2호)·원각사비(보물 3호)·앙부일구(仰釜日晷:해시계) 받침돌[臺石] 등의 문화재와, 1980년에 제작·건립된 3·1운동기념탑, 3·1운동벽화, 의암 손병희 동상, 한용운 기념비(1967년 건립) 등이 건립되어 있다.

1983년 서울시가 그 자리에 투시형 담장을 설치, 서문(西門)과 북문(北門) 등 사주문을 복원하고, 공원 부지도 확장·정비함으로써 조상의 독립정신을 기리는 사적공원(史蹟公園)으로 그 면모가 바뀌었다. 2009년에는 한강·청계천·선유도공원·독립문 등과 함께 ‘서울 디자인 자산’ 근·현대 건축부문(11곳)에 선정되기도 했다.

항상 서울 시민에게 아늑한 휴식 공간을 제공하며 친근해진 탑골공원.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조선광문회에서 태동해 이곳에서 울려 퍼졌던 ‘대한독립만세’의 뜨거운 함성은 영원히 식지 않은 채 우리의 정신적 유산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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