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반 세기를 넘겼다. 1968년 3월, 불과 18세였던 소년이 가출을 한다. 비틀즈와 롤링스톤즈, 벤처스를 좋아하던 소년은 오로지 유명한 기타리스트를 꿈꾸면서 무작정 집을 나왔다. 완고했던 아버지의 반대로 ‘딴따라’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소년은 집을 나와서 좋아하는 음악을 마음껏 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았다. 친구들과 결성한 그룹 에트킨즈가 설 수 있는 무대는 기껏 미8군들이 드나들던 경기도 파주의 허름한 나이트클럽 <DMZ> 뿐이었다. 아버지에게 붙들려서 잡혀갔다가 또다시 가출을 거듭했던 그 미소년을 우리는 오늘 조용필이라고 부르고, 가왕이라고 쓴다. 누군가는 ‘우리시대 최고의 명창’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가 가수로 살아온 세월은 이 땅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도 참 치열했던 시간이었다. 하루도 평온하지 않았다. 여전히 먹고 사는 문제가 우리 모두를 옥죄였기에 늘 전투적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그 공간 속에서 조용필은 우리에게 늘 위로였고, 자랑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였다. 누구도 그 사실에 대해 부인하지 않았다. 그 이면에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최고의 연주자인 조용필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정상에 있으면서도 늘 자신을 채찍질 하면서 음악 외에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열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고의 노래를 불렀지만 더 좋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 몸부림쳤다. 또 최고의 무대를 만들고도 좀더 나은 무대를 위해 밤을 새웠다. 음악에 미치치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에게서 음악을 지우면 삶이 쓸쓸해 보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가 발표한 정규앨범 19장은 이미 대한민국 대중가요사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그의 노래가 곧 한국 대중가요의 변천사이자 발달사이다. 또 30주년 35주년, 40주년을 채웠던 공연들은 여러가지 신기록을 갈아치우면서 한국 공연의 역사를 새로 썼다. 지난해 노래인생 50년을 기념하여 대대적인 공연을 갖고 반세기를 마감했다. 이제 그가 내딛는 한 발짝, 한 발짝이 이 나라 노래의 역사가 된다.   

모든 스타의 탄생은 극적이다. 조용필이라는 이름 석자와 노래가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신군부 정권이 광주를 피로 물들이면서 권좌에 오른 1980년이었다. 레코드점에서 처절하게 흘러나오던 ‘창밖의 여자’는 그 이전의 노래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 주인공이 조용필이라는 걸 아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 노래를 광주의 혼을 달래는 영가로 들었고, 실패로 돌아간 민주화 의 꿈을 위무하는 연가로 듣기도 했다. 이미 조용필은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스타덤에 오른 가수 중의 한 명이었지만 ‘창밖의 여자’와 ‘단발머리’ 속의 조용필은 분명 다른 아티스트였다. 파주 용주골의 허름한 자취방에서 오롯이 키웠던 꿈과 대마초로 인한 오욕의 시간 동안 ‘득음’의 경지에 올랐던 노력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신군부와 함께 등장한 것이다. 듣는 이들의 가슴을 후벼 파거나 설레게 만드는 카리스마 넘치는 보컬은 어떤 노래를 불러도 조용필 표로 만드는 마력을 갖고 있었다. 또 한 편으로는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리듬과 멜로디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작곡가로서의 능력이 그에게 있었다. 무엇보다도 자신과 함께 무대에 서는 밴드 ‘위대한 탄생’ 만큼은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 음악을 구사하는 최고의 밴드여야 한다는 고집이 그를 만들었다. 다른 모든 것은 양보해도 음악만큼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다는 고집이 있었기에 80년대 그가 스스로 ‘가수왕’을 반납하는 순간까지 늘 최고의 자리에 있었다. 아니 그 이후로도 그는 늘 최고였다. 

그는 한 편으로 겸손하면서도 모험을 즐기는 아티스트였다. 가요계에서는 거의 맨 처음으로 일본진출을 통해 한국가요의 우수성을 확인시켜준 가수가 조용필이었다. 요즘에는 한류라는 말이 보편화됐지만 조용필이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갔던 80년대에는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한 조용필에 대해 일본인들은 처음부터 열광한 건 아니었다. 조용필이 가지고 있던 탁월한 음악 실력을 확인한 뒤에야 일본인들은 조용필에게 박수를 보냈다. 조용필은 여전히 ‘죽의 장막’이라고 불렸던 중국을 뚫기 위해 노력했던 가수였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중국과 공식수교를 하기 이전부터 조용필은 중국을 공략했다. 그가 국내에서 가수왕 반납을 선언한 건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아시아 시장으로 나아가는 가수가 되겠다는 다짐 같은 거였다. 그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일본과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가수를 넘어서 아시아가 인정하는 가수가 되기 위해 노력했던 최초의 한국 가수였다.         

조용필의 50년을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건 노랫말이다. 그는 새앨범을 만들 때마다 최고의 작사가들과 함께 했다. 그래서 그의 노래는 늘 노래 이상의 그 무엇이었다. 한 편의 시였고, 한 편의 대하장편이었다. 그가 진성과 가성을 오가면서 부른 노래들이나 판소리 가락을 섞어 부른 노래들, 또 탁월한 한국적 로커로서의 면모를 보이면서 부른 노래들은 한결같이 이 시대를 아파하면서 살아온 우리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는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찾아 헤매는 킬로만자로의 표범’이었고,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다가 초라한 골목에서 몸을 눕히는 소시민’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 겨울의 찻집에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문학 청년’이었으며, ‘푸른 언덕으로 배낭을 메고 훌쩍 떠날 줄 아는 낭만’도 갖고 있었다. 조용필의 히트곡을 이어 붙이기만 해도 족히 서너 편의 뮤지컬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얘기가 설득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오늘의 조용필을 만드는 데 있어서 엄격한 자기 관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가 활동했던 지난 세기는 대중음악가들에게 풍요로운 시절이 아니었다. 음악보다는 돈을 위해 부나방처럼 모여들어서 서로 물고 뜯는 약육강식의 시장이 대중음악 시장이었다. 아티스트보다는 레코드 업자들이 훨씬 돈을 잘 벌었으며, 밤무대를 멀리하고는 아티스트의 생계가 어려웠던 세월이었다. 또 유명세에 기대어서 스캔들을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지어내는 황색언론과 말 만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도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 와중에 조용필은 음악가로서의 자존심을 지켜가면서 자신을 갈고 닦는데 잠시도 게으름을 핀 적이 없으며, 한 눈을 팔지도 않았다. 1970년대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니던 청춘스타로 출발하여 칠순을 눈앞에 둔 대가수로 살아오기까지 잠시도 자신을 내려놓고 편히 쉬지 않았기에 오늘의 조용필이 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대중음악 시장이 일대 변혁기를 맞게 되지만 조용필은 흔들림 없이 자신의 음악세계의 깊이와 넓이를 더해오면서 대중음악 역사를 늘 새로 썼다. 대중음악인에게 문호를 열지 않았던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장기공연을 했으며, 잠실운동장에 5만여 명의 관객을 모으면서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또 1996년 16번째 앨범 ‘바람의 노래’와 19집 앨범 ‘헬로’와 ‘바운스’를 통해 그가 영원한 현역임을 증명해 냈다. 그는 새앨범을 통해 안정을 택하지 않고 모험하고 도발했다. 사람들이 조용필에게 기대하던 그것과 달리 젊고 모던한 노래로 승부했고, 그 승부가 정확하게 시장에서 통하면서 팬들의 열광을 이끌어냈다. 이처럼 어제에 머무르지 않고, 내일을 꿈꾸는 도전정신과 청년정신을 가진 아티스트라는 점에서 조용필의 남다름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아는 가수이기도 하다. 온 국민의 통일을 향한 염원을 담아 평양공연을 했으며, 누구보다도 먼저 일본과 중국 시장을 개척했던 원조 한류가수였다. 또 한 편으로는 자신이 음악을 통해 벌어들인 돈을 사회에 환원하고도 소문이 날까봐 쉬쉬하는 겸양을 갖고 있으며, 소록도 등 소외지역을 찾아 공연을 하는 등 낮은 데로 임할 줄 아는 가수이기도 하다.

지난 반세기 동안 조용필은 대한민국이 그래왔듯이 숱한 영광과 좌절을 나눠 겪으면서 지금 이 자리에 있다. 그가 처절하게 사랑의 상처를 노래할 때 우리는 그를 부둥켜 안고 울었고, 그가 세상을 향해 씩씩하게 걸어나갈 때 우리도 함께 행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젠 됐다’고 얘기하지 않는다. 아직도 일주일에 두세번씩 좋은 노래를 만들기 위해 밤을 새우는가 하면, 자신의 밴드들과 손가락이 부르트도록 연습을 한다. 그가 메고 다니는 백팩에는 영양제나 약봉지 대신 늘 악보들이 가득하다.

그래서 그의 영원한 팬임을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조용필을 연호한다. 그들의 가슴 속에 영원한 현역이자 청년 같은 가수로 기억되는 이유는 그가 잠시도 우리 곁을 떠나서 과거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연장을 찾는 많은 관객들은 과거의 추억을 찾으러 갔다가, 현재의 감동을 찾아서 공연장을 나선다. 조용필은 늘 저만치 있는 가수이기 때문이다. 

글 오건(대중문화평론가), 피규어 제작 양한모(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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