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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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 하시네/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양주동 작시, 이흥렬 작곡 ‘어머니 마음’ 1절)

이 곡은 모두 3절로 된 우리 가곡이다. 언제 어떻게 지어졌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이흥렬이 작곡생활 중 주로 가곡에 몰두했던 1940년쯤으로 추측된다. 오로지 자식의 뒷바라지를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잘 묘사된 아름다운 시에 감미로운 멜로디가 어우러져 나이를 불문하고 널리 애창되는 곡이다.

특히 5월 8일 ‘어머니의 날(현재 어버이날)’에는 기념식장은 물론, 모든 가정에서 널리 불렸다. ‘어머니의 날’은 1956년 국무회의에서 해마다 5월 8일로 정해 17회까지 이어진 뒤 1973년에는 ‘어버이날’로 명칭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다는 어머님의 은혜를 한 곡의 노래로 모두 담아낼 수야 없겠지만 해마다 5월, 이 노래를 다시 불러 보면 왠지 모르게 가슴 뭉클하고 눈자위 붉어짐이 오로지 나만의 소회는 아닐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인 1928년,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 태어나셨다. 전라북도 무주(茂朱)가 고향인 외조부께서 전 가족을 이끌고 후쿠오카로 이주, 정착해 있었던 터라 어머니는 타국에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것이었다. 일본 전통문화와 풍습만이 존재하는 그곳에서 여학교까지 마치는 동안 어머니에게 ‘한국’이라는 개념은 거의 깃들어 있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 이후에 터무니없이 파생된 한국인에 대한 멸시와 차별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가급적 한국인이라는 티를 내지 않으려는 의식이 짙게 깔려 있었던 것이 큰 이유였다.

그러나 1945년, 그토록 꿈꾸어 오던 조국해방의 가슴 벅찬 소식이 밀물처럼 밀려들자 외조부는 가족 중 몇몇을 이끌고 귀국길에 오른다. 이때 어머니도 막내 동생과 함께 고국 땅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우리말을 단 한 마디도 못했음은 물론이고 한국의 낯선 풍습 앞에 맞닥뜨렸을 때의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리라.

그때 어머니의 나이 18세. 한창 꽃다운 시절이었다. 그러나, 부모의 손에 이끌려 찾은 고국은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건국을 향한 과도기적 혼란이 끊이지 않았고, 오로지 땅만 의지하고 살아가는 민초들의 생활은 피폐하기만 했다. 더욱이 좌우의 체제 갈등 속에 표류하던 조국은 결국 남북 분단이라는 엄청난 아픔까지 떠안고야 말았다.

1950년, 피를 나눈 민족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한국전쟁의 와중에 어머니는  친척이 정착해 살고 있던 울산에 다니러 와 잠시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울산과 인연을 맺게 될 운명이었던지 그 짧은 체류 중 누군가가 중매를 서게 된다.

그러나, 우리말도 서툰 데다 가문의 전통과 생활풍습이 전혀 다른 먼 타지의 사람을 맏며느리로 들일 수 없다는 집안 어른들의 거센 반발이 일었다. 영·호남의 집안이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그 무렵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집안의 끈질긴 반대를 물리치고 마침내 혼인은 성사되고 말았다. 고지식한 집안 어른들의 반대를 무릅쓴 아버지의 강한 의지가 관철된 것이었다.

그로부터 70여 년. 숱한 고난과 역경의 거센 파도를 어머니는 연약한 몸으로 버텨 내며 한 시대를 대변하는 산증인으로 자리매김해 오셨다. 어느덧 구순에 접어든 어머니는 하반신 장애로 현재 요양병원에서 재활치료의 힘든 나날을 보내고 계신다.

치욕의 일제 강점기, 한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6․25전쟁의 비극, 그리고 보릿고개로 이어진 생활고의 처절함. 숙명으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가혹했던 그 험난한 가시밭길을 헤쳐 온, 이제는 고령으로 접어 든 이 땅의 어머니들에게 ‘가정의 달’ 5월을 맞으며 높으신 그 은혜 앞에 엎드려 큰 절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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