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길

1392년 ‘아침의 나라’ 조선을 연 태조 이성계는 3년 만에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여 천도를 단행한다. 태조는 한양 천도를 위해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다음, 1395년 9월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이듬해 정월부터 전국에서 11만 8000여 명이 동원되는 대대적인 공사를 벌인 끝에 총연장 5만 9500척(약 19km)에 달하는 한양도성 축조의 대강을 마무리한다. 정도(定都) 600년, 서울 역사의 진정한 출발이었다. 

정도 600년, 서울 나들이의 첫걸음을 한양도성으로 삼는 것은 그만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우리가 그 순성길에서 만나는 것은 유구한 시간의 흐름과 연면한 역사의 숨결이다.
정도 600년, 서울 나들이의 첫걸음을 한양도성으로 삼는 것은 그만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우리가 그 순성길에서 만나는 것은 유구한 시간의 흐름과 연면한 역사의 숨결이다.

북악산·낙산·인왕산·남산의 내사산(內四山)에 둘러싸여, 숭례문·돈의문·숙정문·흥인지문의 4대문과 소의문·창의문·혜화문·광희문의 4소문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은 역사의 풍파와 함께 부침을 거듭해왔지만, 그 역사와는 별개로 서울사람들에게 또 다른 즐거움을 안겨주기도 했다. 봄이 되면 짝을 지어 성 둘레를 한 바퀴 돌면서 도성 안팎의 경치를 구경하는 이른바 ‘순성놀이(巡城-)’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온 ‘서울 사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다. 

1396년 축성된 한양도성은 임진왜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상당한 구간이 훼손되었으나 꾸준한 복원사업으로 약 70%가 제 모습을 찾아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옛 이화여대 동대문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한양도성박물관이 들어섰다.
1396년 축성된 한양도성은 임진왜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상당한 구간이 훼손되었으나 꾸준한 복원사업으로 약 70%가 제 모습을 찾아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옛 이화여대 동대문병원이 있던 자리에는 한양도성박물관이 들어섰다.

<순성의 즐거움>을 펴낸 김도형은 ‘순성장거(巡城壯擧)’의 방식으로 한양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에서 출발하여 시계방향으로 돌기를 권장하지만, 오늘 우리는 역방향으로 흥인지문에서 출발하여 낙산공원을 거쳐 혜화문에 이르는 길을 택한다. 동대문성곽공원에 한양도성의 역사를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한양도성박물관이 있고, 낙산을 넘어 혜화문에 이르는 길이 여러 다른 구간보다 성 안팎의 풍경을 동시에 감상하면서 그 풍경에 담긴 삶의 역사를 반추하기에는 더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왼쪽/높다란 성곽에 걸터앉은 에트랑제가 다사로운 봄볕을 즐기고 있다. 마치 몽마르트 언덕에라도 나앉은 것처럼. 오른쪽/동대문성곽공원에서 내려다본 동대문 일원은 서울의 어제와 오늘을 적당히 섞어 보여준다.
왼쪽/높다란 성곽에 걸터앉은 에트랑제가 다사로운 봄볕을 즐기고 있다. 마치 몽마르트 언덕에라도 나앉은 것처럼. 오른쪽/동대문성곽공원에서 내려다본 동대문 일원은 서울의 어제와 오늘을 적당히 섞어 보여준다.

이 구간 순성놀이의 정점은 아무래도 낙산공원이다. 궁중에 우유를 공급하는 젖소 목장이 있다 해서 ‘타락산(駝酪山)’, 낙타 등처럼 불룩 솟았다고 해서 ‘낙타산(駱駝山)’으로 불리기도 한 낙산 정상에 서면 그 고도와는 무관하게 성 안팎으로 일망무제 펼쳐지는 한양도성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조감할 수 있다. 성 안으로 한양의 주산인 북악산이 도심 깊숙이 녹음을 드리우고, 밖으로는 성북동 너머로 멀리 서울의 진산인 북한산이 위용을 드러낸다. 

낙산공원에서 바라본 성 안. 한양의 주산인 북악산이 도심까지 짙은 녹음을 드리운다. 앞에 보이는 갈림길 언저리에 ‘홍덕이밭’이 있다.
낙산공원에서 바라본 성 안. 한양의 주산인 북악산이 도심까지 짙은 녹음을 드리운다. 앞에 보이는 갈림길 언저리에 ‘홍덕이밭’이 있다.

성 안팎으로 사람에 얽힌 이야기도 다채롭다. 성 안으로는 낙산정 아래 ‘홍덕이밭’이 있는데,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봉림대군(훗날 효종)이 홍덕이란 수행 궁녀가 담가준 김치 맛을 잊지 못해 왕위에 오른 후 땅을 하사하고 배추를 길러 김치를 담그도록 했다는 곳이다. 성 밖 낙산 서쪽 자락의 ‘자주동샘(紫芝洞泉)’에는 궁궐에서 쫓겨난 단종 비 정순왕후가 인근 절에 머무르면서 비단을 짜 생계를 이어갈 때 샘물에 명주를 담그면 자줏빛으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자주동샘 앞에는 ‘비우당(庇雨堂)’ 터가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수광이 <지봉유설>을 저술한 곳으로, 그의 5대 외조부이자 청백리로 유명했던 정승 류관이 이곳 초가삼간에 살면서 장마 때 비가 새면 우산으로 낙수를 가리며 지냈다는 일화에 따라 ‘비를 겨우 가릴 수 있는 집’이라는 뜻의 ‘비우당’으로 이름 지었다 한다. 

낙산공원에서 바라본 성 밖. 성북동 너머로 서울의 진산 북한산이 펼쳐진다.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성곽마을인 장수마을을 지나 ‘자주동샘’에 이른다.
낙산공원에서 바라본 성 밖. 성북동 너머로 서울의 진산 북한산이 펼쳐진다.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성곽마을인 장수마을을 지나 ‘자주동샘’에 이른다.

낙산공원에서부터는 성 밖으로 난 길을 걷는다. 성 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체성(體城, 성의 몸체)과 여장(女墻, 체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전체를 살펴보며 여러 차례에 걸친 보수과정과 복원의 흔적들을 더듬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양도성은 태조가 처음 축성한 이래 약 20여년 뒤에 세종이 크게 보수하고, 다시 약 300년 뒤에 숙종이 대대적인 보수를 했는데, 각 시기별로 축성방식이 달라 그 형태가 쉽게 구분된다. 그리고 근래에 복원한 부분들은 세월이 입힌 때에서부터 벌써 확연히 차이가 난다. 

성 밖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성곽을 이루고 있는 돌의 크기와 모양이 다른데, 이는 도성을 축성·보수한 시기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깨끗한 성돌은 근래 들어 복원한 것이고.
성 밖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성곽을 이루고 있는 돌의 크기와 모양이 다른데, 이는 도성을 축성·보수한 시기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깨끗한 성돌은 근래 들어 복원한 것이고.

이 구간 순성의 끝자락에 이르면 이윽고 혜화문이 눈에 들어온다. 혜화문은 한양도성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다. 낙산에서 동소문로로 내려서면 성문이 높은 언덕에 우뚝 솟아있다. 동소문로는 ‘동소문(東小門)’으로도 불렸던 혜화문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인데, 본디 문이 있던 자리에는 큰 길이 뚫리고 성문은 쫓겨나듯 언덕바지를 타고 올라앉았다. 그것도 1994년 새롭게 복원된, 진품이 아닌 모조품인 채로. 한양도성 자체가 지속적인 복원작업을 통해 겨우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는 형편을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낙산공원의 끝자락에 이르면 동소문로 위로 올라타고 앉은 혜화문이 나타난다. 성북동 마을 너머로 북악스카이웨이의 능선이 아련하다.
낙산공원의 끝자락에 이르면 동소문로 위로 올라타고 앉은 혜화문이 나타난다. 성북동 마을 너머로 북악스카이웨이의 능선이 아련하다.

√ 5월 5일에는 한양도성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종묘에서 종묘대제가 열린다. 조선 정신의 정수를 보여주는 공간에서 그 뿌리를 기리는 제례를 보고난 후 한양도성을 둘러본다면 순성의 의미를 더욱 깊게 할 수 있다.

√ 서울시 한양도성도감에서는 순성놀이의 즐거움을 되살린 스탬프투어를 실시하고 있다. 한양도성 4개 구간에 스탬프 찍는 장소를 설치해두고, 스탬프 4개를 받으면 완주배지를 수여한다. 스탬프투어 종이 뒷면에는 꽤 잘 만들어진 한양도성 관광안내지도가 인쇄되어 있다.

-샛길로
낙산공원 바로 아래에 위치한 이화동은 조선시대 ‘쌍계동(雙溪洞)’이라 불렸으며, 양반들이 풍류를 즐기던 도성 내 5대 명소 중 한 곳으로 꼽혔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을 위한 고급주택들이 들어섰고, 해방 이후 이승만 정부 시기에는 이화장 일대의 불량주택 개선을 목적으로 국민주택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이후 주택이 노후된 채로 2000년대까지 아무런 변화도 갖지 못했고, 마을주민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2006년 문화체육관광부는 노후되어 방치된 지역의 정주여건 개선을 위해 복권기금을 이용한 도시예술 캠페인을 전개했다. 2006년 9월부터 12월까지 약 3억 5000만원의 예산으로 이화동과 동숭동 일대에 주민과 예술인, 대학생과 자원봉사자의 참여로 벽화가 그려졌다. 이 프로젝트의 결과로 이화동은 벽화마을로 유명세를 타고, TV프로그램이나 각종 드라마·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면서 관광명소가 되었다.

비록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이화동 골목길은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져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매력적인 공간이다.
비록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이화동 골목길은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져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매력적인 공간이다.

하지만 이화벽화마을은 밀려드는 방문객들로 몸살을 앓아야 했고, 사생활 침해 등 ‘과도관광’을 견디지 못한 주민들은 마침내 일부 벽화를 철거하기에 이르렀다. ‘꽃계단’과 ‘물고기계단’은 이 마을에서 가장 유명했으나 회색 페인트로 덧칠되었고, KBS2 ‘1박2일’에서 이승기가 촬영하면서 인기를 끈 ‘하얀 천사 날개’ 벽화는 결국 벽화를 그린 사람이 직접 철거하기도 했다. 이에 종로구에서는 벽화마을이 관광지이기 이전에 주민의 생활공간임을 알리고, 지역주민의 정주권을 보호하면서 관광객의 관광태도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정숙관광 캠페인’을 시행하기도 했지만 형편이 나아질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어쩌면 머지않아 북촌한옥마을처럼 ‘관광허용시간제’까지 검토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길은 항시 사람의 삶으로 해서 몸살을 앓는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주민들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어차피 삶조차 풍경인 것을.
 

여행작가 유성문은 길에서 길의 내력을 들춰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겨왔다. 그 내력과 사연은 먼빛이 되어 다시 그를 길로 내세운다. ‘길에서 길을 묻다’(경향신문), ‘사람의 길’(주간경향) 등 오랫동안 길과 사람 이야기를 써왔다. 문학관기행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를 펴내기도 했다.

저작권자 © 애플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