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길

조주(趙州)가 관음원(觀音院)에 머물 무렵, 수행자 두 사람이 그를 찾아와 절을 올리고는 이렇게 물었다.
“불법(佛法)의 큰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곳에 온 일이 있는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면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喫茶去).”
곁에 있던 또 다른 수행자가 물었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큰 뜻이 무엇입니까?”
“이곳에 온 일이 있는가?”
“예, 한 번 있습니다.”
“그러면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喫茶去).”
옆에서 듣고 있던 원주(院主) 스님이 물었다.
“스님! 어째서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사람이나, 한 번이라도 온 적이 있는 사람이나 모두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라고 말씀하십니까?”
“원주, 자네도 차나 한 잔 들고 가시게(喫茶去).”

‘끽다거(喫茶去)’는 1992년 조계사 길목 견지동에서 0.6평으로 시작한 차와 다도구(茶道具) 전문점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무료 차 시음을 통해 보이차를 비롯한 다양한 차를 국내시장에 소개하는 등 차문화 보급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끽다거에서의 차 한 잔으로도 ‘다선일여(茶禪一如)’의 화두를 미처 깨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겠다. 조계사로 가야 한다. 부처님이 오신단다.

<strong>‘끽다거’라는 유명한 화두를 남긴 조주 종심(從諗, 778~897) 선사는 중국 당나라 시대의 선승(禪僧)으로, 차를 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조계사 길목의 차 전문점 ‘끽다거’는 조주의 화두를 잇고자 한다. 끽다거는 흔히 생각하는 ‘찻집’은 아니다. 차와 차에 관련된 도구들을 파는 가게다. 그렇지만 언제든 차 한 잔쯤은 거저 얻어먹는 보시를 누릴 수 있다. 운이 좋으면 때 맞춰 들어온 귀한 차도 맛볼 수 있고.
‘끽다거’라는 유명한 화두를 남긴 조주 종심(從諗, 778~897) 선사는 중국 당나라 시대의 선승(禪僧)으로, 차를 선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조계사 길목의 차 전문점 ‘끽다거’는 조주의 화두를 잇고자 한다. 끽다거는 흔히 생각하는 ‘찻집’은 아니다. 차와 차에 관련된 도구들을 파는 가게다. 그렇지만 언제든 차 한 잔쯤은 거저 얻어먹는 보시를 누릴 수 있다. 운이 좋으면 때 맞춰 들어온 귀한 차도 맛볼 수 있고.

조계사 일주문에 다다르기 전, 잠시 이화불교사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조계사 일대에는 많은 불교용품점들이 몰려있다. 염주와 향초, 다기와 제기, 목탁과 죽비, 법복에서 밀짚모자와 걸망에 이르기까지, 산사의 일상이 눈앞에 그려진다. 산사에서는 수행과 울력이 다르지 않고, 정진과 공양이 다르지 않다. 이제는 ‘다선일여(多禪一如)’의 화두이런가. 아까 끽다거에서 마신 보이차 한 잔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부처님은 왜 오시는가.  

회색조이기 십상이던 불교용품가게들은 초파일을 맞아 잠시 화사한 연등으로 장식된다. 그에 걸맞은 조금은 들뜬 음악이라도 틀어주면 좋으련만.
회색조이기 십상이던 불교용품가게들은 초파일을 맞아 잠시 화사한 연등으로 장식된다. 그에 걸맞은 조금은 들뜬 음악이라도 틀어주면 좋으련만.

‘대한불교 총본산 조계사(大韓佛敎總本山曹溪寺)’란 현판이 화려한 조계사는 우리 근현대불교의 파란곡절을 그대로 품고 있는 절이다. 이 절의 연기(緣起)는 ‘삼각산 태고사’에서 발단한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조선사찰령을 선포한 이후 모든 사찰을 일본 사원인 장충단 박문사로 귀속시키려 할 때 해인사 주지 희광, 마곡사 주지 만공, 그리고 한용운 등이 31본산 주지회의를 열어 당시 이곳에 있던 각황사에서 ‘총본산 태고사’ 창건을 결의함으로써 근대불교의 대가람으로 태어난 것이다. 

1938년 삼각산에 있던 태고사를 이전하는 형식으로 창건된 조계사에는 이렇다 할 문화재가 없다. 다만 경내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송동의 백송’과, 1930년 스리랑카의 달마파라가 가져온 부처 진신사리 1과를 모신 7층석탑이 눈여겨볼만한 정도다. 왼쪽/유독 흰 비둘기 한 마리, 진신사리탑에 앉아 오수를 즐기고 있다. 하긴 오수도 선이려니. 오른쪽/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조계사의 백송은 부처님 오신 날 즈음이면 성탄트리 역할을 한다.

때문에 조계종의 기원은 태고종이었고, 태고종 초대 교정(敎正)은 청정비구인 박한영이었다. 하지만 태고사 창건의 일원이었던 희광은 후에 친일파가 되고, 일제 말기에는 친일 승려인 월정사 출신 이종욱이 중앙교무원장을 누리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비구(比丘)와 대처(帶妻)로 갈라져 분규를 일삼다가, 1954년 전쟁 직후 일어난 불교정화운동에 따라 비구가 종권을 확보하고 태고사를 점령 인수하면서 조계종찰 조계사로 개칭되었다. 이후에도 종권 등을 둘러싼 분규가 끊이지 않았고, 5공 시절에는 대규모 법난을 겪기도 해야 했다. 

조계사 향공양. 향은 자신을 태움으로써 그윽한 향기를 발산한다. 향기는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고, 모든 것에 스며들어 그 자체가 된다.
조계사 향공양. 향은 자신을 태움으로써 그윽한 향기를 발산한다. 향기는 자신을 내세우지도 않고, 모든 것에 스며들어 그 자체가 된다.

이 모든 분규와 흑역사의 이면에는 최고 승직 등 종단권력과, 전국적으로 가장 많은 사찰수입, 때론 외부 정치권력과의 관계 등이 깔려있다. 오죽하면 ‘성불하지 못한’ 시인 고은조차 ‘조계사, 그것은 이 나라 불교를 위해서 하나의 필요악이다. 전국의 모든 절에 사는 스님이 다 성불한 뒤에야 겨우 성불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절을 찾아서>)’고까지 했을까. 지금 조계사에 딸린 불교중앙박물관에서는 ‘나들이 나온 나한’과 ‘불심의 향연’을 테마로 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데, 그 한켠에 법정스님의 유품과 친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무소유’의 육필글씨는 이렇게 이른다.

옳거니 그르거니 내 몰라라
산이건 물이건 그대로 두라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세계랴
흰 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불교중앙박물관 앞.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세계랴. 그래, 노숙의 심사도 그대로 두라.
불교중앙박물관 앞.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세계랴. 그래, 노숙의 심사도 그대로 두라.

지난 주말 종로거리에서는 연등제가 열렸다. 취타대를 선두로 각양각색의 영롱한 불빛들이 밤거리를 수놓았다. 동대문에서 조계사까지 ‘석가무니불, 석가무니불’ 염불소리가 꼬리를 이었다. 고은은 앞의 글에서 ‘이런 최대 축제가 지나간 뒤의 조계사는 더욱 처참하다’고 했지만, 부처님을 맞이하는 끝도 없는 행렬은 조계사로 조계사로 물밀듯 밀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제등행렬이 다 지나간 뒤, 거리는 밤하늘의 별빛보다 더 휘황한 네온사인 불빛으로 번쩍거렸다. ‘빈자일등(貧者一燈)’은 어디로 갔는가. 

연등제 행렬에 참가한 한 불자는 구경나온 외국인 가족 아이의 천진난만함에 어쩔 줄 모르고, 가던 길까지 멈춰가며 손을 잡아준다. 그 행복한 표정들이 연등의 불빛보다 더 밝고 따스하다.
연등제 행렬에 참가한 한 불자는 구경나온 외국인 가족 아이의 천진난만함에 어쩔 줄 모르고, 가던 길까지 멈춰가며 손을 잡아준다. 그 행복한 표정들이 연등의 불빛보다 더 밝고 따스하다.

√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에서는 4월 3일부터 7월 31일까지 테마전 ‘나들이 나온 나한’과 ‘불심의 향연’이 열린다. 영취산 흥국사에서 모셔온 십육나한과 불교공예품 등이 전시된다. 관람시간은 10:00~18:00이며, 매주 월요일은 쉰다. 관람료는 무료다.

√ 조계사 맞은편에 있는 템플스테이홍보관은 템플스테이와 사찰음식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곳이다. 내·외국인 누구나 템플스테이를 즐길 수 있도록 관련 정보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한편, 스님과의 차담, 사찰음식체험, 전통문화체험 등도 운영하고 있다.

-샛길로
같은 서울 도심사찰이지만 강남의 봉은사는 또 다른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항상 번잡한 조계사와는 달리 그나마 자연 속에서 잠시 소요할 수 있는 곳이다. 사찰의 역사 역시 조계사와는 비할 바가 아니어서 신라 원성왕 시절에 창건된 수도산 견성사를 뿌리로 하고 있다. 원래 절의 위치는 지금과 달랐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 성종의 능(선릉)을 지키는 ‘능침사찰’이 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절이 이동되고 많은 땅을 하사받게 된다. 이 때문에 ‘은혜를 받든다’는 뜻의 ‘봉은(奉恩)’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했다. 
이후 불교를 사랑했던 문정왕후 때는 선종 수사찰이 되어, 과거제도 중 승과시험을 보는 장소이기도 했다. 당시 문정왕후의 분부로 주지가 되어 고려 때의 승과시를 부활한 이가 고승 보우였다. 하지만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 유생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고, 봉은사와 승과시험을 없애야 한다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결국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고 난 후‘요승’으로 몰려 제주로 귀양 갔다 참형에 처해지고 말지만, 그가 부활시킨 승과시 때문에  서산대사, 사명당 같은 이름 있는 승려들이 나와 임진왜란 등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왼쪽/봉은사의 보물로 치는 판전의 현판 글씨는 추사 만년의 걸작이다. 오른쪽/봉은사는 도심 속에서 잠시 소요의 공간이 되어준다. 입구 바로 맞은편에 코엑스가 있고 차량도 엄청나게 많지만 신기하게도 봉은사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바깥의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왼쪽/봉은사의 보물로 치는 판전의 현판 글씨는 추사 만년의 걸작이다. 오른쪽/봉은사는 도심 속에서 잠시 소요의 공간이 되어준다. 입구 바로 맞은편에 코엑스가 있고 차량도 엄청나게 많지만 신기하게도 봉은사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바깥의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봉은사 역시 세속의 풍진을 벗어나진 못했다. 강남이 개발되기 전까지 봉은사 주변은 허허벌판 논밭이었고, 서울에서는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오지와 다름없었다.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봉은사는 주변에다 말죽거리의 1만평 논까지 합쳐 10만평에 달하는 땅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강남이 개발되면서 갈등이 생겼다. 일제강점기 대처승과 비구승의 대치로부터 비롯한 갈등은 마침내 폭력사태까지 불러일으켰다. 1988년 부유한 절의 주지 임명권을 둘러싸고 폭력배들까지 동원되는 이른바 ‘봉은사사태’였다. 2010년에는 직영사찰 전환문제로 정치권과 마찰을 빚기도 했는데, 여기에 당시 주지였던 명진스님이 개입되었다는 일설이 돌면서 봉은사 승려들과 신도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쳤었다. 이에 당사자인 명진스님은 승직을 포기하고 조계종단 승적까지 탈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여행작가 유성문은 길에서 길의 내력을 들춰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겨왔다. 그 내력과 사연은 먼빛이 되어 다시 그를 길로 내세운다. ‘길에서 길을 묻다’(경향신문), ‘사람의 길’(주간경향) 등 오랫동안 길과 사람 이야기를 써왔다. 문학관기행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를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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