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풍물시장과 동묘벼룩시장

패거리들의 꾐에 빠져 여학생들과 인근 유원지로 놀러가던 날, 나는 장롱 깊숙이 감춰진 삼촌의 카메라를 빼내는 데 성공했다. ‘자, 김~치’하며 요란법석을 떨었지만, 그때 그 카메라에 필름이 들어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미안하다, 녀석들아. 그렇지만 그때 그 장면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내 추억 속에 고스란히 박혀있단다.” -유성문 ‘추억 속으로-카메라’(경향신문, 2005.5.23자) 

기억은 잔인하지만 추억은 아름다운 것일까. 풍물시장에 나앉은 낡고 오래되어 이제 쓸모를 잃어버린 듯한 물건을 바라보는 일은 서글프지만, 문득 그 물건에 얽힌 추억을 떠올리면 시간은 살며시 온기를 띠기 시작한다. 물론 추억에도 밝음과 어두움이 있겠지만, 설사 어두운 추억일지라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다. 시간이 묻힌 때는 어떤 이유인지 추억하는 순간 그리움으로 변한다. 그것은 어쩌면 이미 사라졌거나 잃어버렸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신설동의 서울풍물시장은 ‘새것’보다는 ‘헌것’을 다루는 시장이다. ‘헌것’은 ‘추억’의 다른 이름이다. 낡고 늙은 물건들 앞에서 그들의 젊은 날을 상상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지만, 한편으로 잔인한 일이기도 하다.
신설동의 서울풍물시장은 ‘새것’보다는 ‘헌것’을 다루는 시장이다. ‘헌것’은 ‘추억’의 다른 이름이다. 낡고 늙은 물건들 앞에서 그들의 젊은 날을 상상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지만, 한편으로 잔인한 일이기도 하다.

서울풍물시장의 추억은 황학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 황학동은 서울 사대문 가운데 하나인 동대문 바깥에 위치해 주로 논과 밭이던 지역이었다. ‘황학동’이란 이름도 ‘황학이 날아와 새끼를 치고 살았다’는 데서 기인한다. 여기서는 주로 채소를 생산해 서울 주민들에게 공급되었다. 그러나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오갈 곳 없는 피란민들이 청계천 주변으로 몰려들면서 급속도로 판자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이 생계를 위해 노점과 고물상을 시작한 것이 황학동시장의 시작이다.

서울풍물시장은 크게 실내 상설시장과 실외 노점시장으로 나뉜다. 특히 주말에는 입구부터 늘어선 좌판과 시장 골목골목을 가득 메운 인파에 놀랄 수밖에 없다.
서울풍물시장은 크게 실내 상설시장과 실외 노점시장으로 나뉜다. 특히 주말에는 입구부터 늘어선 좌판과 시장 골목골목을 가득 메운 인파에 놀랄 수밖에 없다.
또한 동묘벼룩시장까지 이어지는 도로까지 벼룩시장으로 돌변하면서 일대는 거대한 풍물거리가 되어버린다.
또한 동묘벼룩시장까지 이어지는 도로까지 벼룩시장으로 돌변하면서 일대는 거대한 풍물거리가 되어버린다.

황학동시장은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골동품을 주로 취급하면서 크게 성장했다. 한국전쟁 이후 사회재건과 새마을운동 같은 도시화 과정에서 쏟아져 나온 골동품을 전국적으로 수집해 판매하며 번영을 누렸다. 헐값에 산 골동품이 국보급이나 문화재급으로 판정받아 큰 이익을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앞두고 도시정비가 이루어지면서 골동품을 다루던 점포들이 장안평(답십리)으로 대거 이전했고, 그 자리를 중고품을 판매하는 점포와 노점들이 메웠다.

2015년에 문을 연 서울풍물시장 2층의 ‘청춘1번가’는 과거의 전당포, 이발소, 사진관 등을 재현해놓았다. 또한 DJ 부스가 있는 청춘다방, 만화방 등이 있어 ‘추억나들이’로 인기가 높다.
2015년에 문을 연 서울풍물시장 2층의 ‘청춘1번가’는 과거의 전당포, 이발소, 사진관 등을 재현해놓았다. 또한 DJ 부스가 있는 청춘다방, 만화방 등이 있어 ‘추억나들이’로 인기가 높다.

1990년대 후반 IMF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이전부터 늘어나던 노점들도 급증했는데, 2000년대 초반 청계천 복원공사가 이루어지면서 2003년에 폐쇄된 동대문운동장 축구장으로 옮겨 동대문풍물벼룩시장을 개설했다. 하지만 동대문운동장 시대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서울시가 동대문운동장 공원화 사업을 추진하면서 다시 이전해야 했기 때문이다. 서울시는  2008년 동대문풍물벼룩시장을 철거하고 신설동에 있는 옛 숭인여자중학교 부지에 새로운 장터를 조성해 노점 800여 개를 입주시켰다. 본격적인 서울풍물시장의 출발이었다.

서울풍물시장의 노점 옷가게. ‘배바지(어르신) 없음’-. 나는 잠시 뜨끔했다.
서울풍물시장의 노점 옷가게. ‘배바지(어르신) 없음’-. 나는 잠시 뜨끔했다.

전국을 벼룩 뛰듯 돌아다니며 희귀한 물건을 모아온다거나 물건에서 벼룩이 금방이라도 기어 나올 것 같다는 의미에서 ‘벼룩시장’, 오래되고 망가진 물건이라도 감쪽같이 새것으로 된다고 해서 ‘도깨비시장’, 개미처럼 열심히 일한다 하여 ‘개미시장’, 각종 고물을 취급하는 ‘고물시장’, 없는 물건이 없이 다 있으니 ‘만물시장’, 구식이 되어버린 물건이 마지막으로 오는 곳이라 하여 ‘마지막 시장’-. 서울풍물시장은 명칭만큼이나 다양한 사연들이 하나의 역사가 되어 오늘도 추억을 찾고자 하는 이들을 맞고 있다.

과거 벼룩시장의 전통은 동묘를 중심으로 개설되어 있는 동묘벼룩시장을 통해 명맥을 잇고 있다. 현재 평일에는 300여 개, 주말에는 600여 개의 노점이 좌판을 펼치고 있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동묘벼룩시장을 찾는 사람들은 중년층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중년들의 홍대거리’라는 말이 생길 정도이다.
과거 벼룩시장의 전통은 동묘를 중심으로 개설되어 있는 동묘벼룩시장을 통해 명맥을 잇고 있다. 현재 평일에는 300여 개, 주말에는 600여 개의 노점이 좌판을 펼치고 있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동묘벼룩시장을 찾는 사람들은 중년층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중년들의 홍대거리’라는 말이 생길 정도이다.

서울의 근대화 과정에 따라 거래물품을 변화시켜가며 지속적인 변화와 발전을 거듭한 서울풍물시장은 이제 도심 속의 관광지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특히 인접한 동대문시장이 현대화로 인해 대규모 상업지구로 변한 것에 반해 쉽게 시류에 편입되지 않고 ‘중고품 거래’라는 특이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낡고 오래된 물건들 속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지 추억이 아니라 세월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그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자리의 나를 있게 한 근원이기도 할.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한없이 소중했던 사람이 있었음을 잊지 말고 기억해줘요” -최호섭 노래 ‘세월이 가면’에서 

풍물시장이 동대문운동장을 거쳐 신설동으로 옮겨간 후 이제 황학동 본통은 주방거리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황학동 주방거리는 최근 우리 외식산업의 흐름을 읽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오랫동안 지속되는 경기불황으로 지금 주방거리도 침체에 빠져있다. 폐업이나 업종전환에 따라 내놓는 물건을 주로 취급하는 한 중고업체의 주인은 “폐업 물건 받는 우리가 폐업할 지경”이라며 한숨을 내쉰다.
풍물시장이 동대문운동장을 거쳐 신설동으로 옮겨간 후 이제 황학동 본통은 주방거리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황학동 주방거리는 최근 우리 외식산업의 흐름을 읽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오랫동안 지속되는 경기불황으로 지금 주방거리도 침체에 빠져있다. 폐업이나 업종전환에 따라 내놓는 물건을 주로 취급하는 한 중고업체의 주인은 “폐업 물건 받는 우리가 폐업할 지경”이라며 한숨을 내쉰다.

-샛길로 : 창신동 봉제거리
동묘 맞은편의 숭인동과 창신동은 한양도성의 바깥동네로 서민들이 모여 살던 ‘도시 너머 마을’이다. 이 일대는 최근 도시재생사업이 활발하다. 동대문성곽을 내려와 곧바로 몸을 틀면 성곽 바깥으로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창신동 골목길이 이어진다. 창신동은 아직도 900여 개의 봉제공장이 밀집해 있는 동네다. 골목길을 걸으면 가파른 언덕과 휘어진 골목 사이사이 작은 봉제공장 창틀 너머로 재봉틀 소리가 들린다. 특히 대표적인 하청공장이 밀집해 있는 647번지 일대는 ‘살아있는 봉제거리박물관’이라 불린다. 봉제거리를 따라 걷다보면 ‘봉제인 기억의 벽’과 쉼터,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 ‘창신동 봉제공장의 24시간’ 등의 설명을 볼 수 있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 ‘이음피움 봉제역사관’이 있다. 봉제의 역사를 통해 도시의 발전을 돌아보고, 봉제산업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봉제사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한편, 봉제의 미래를 전망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지하1층 체험실에선 ‘시대별 아이콘의상 만들기’ ‘컴퓨터 자수기로 이니셜 새기기’ ‘열전사 캐릭터 스티커 붙이기’ 등의 체험을 할 수 있다. 2층은 봉제산업의 역사와 창신동 이야기를 사진과 글로 풀어내고 있으며, 3층 봉제마스터기념관에는 봉제장인 10인의 가위와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전시하고 있다. 4층 ‘바느질카페’에서는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창신동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 ‘이음피움 봉제역사관’을 가려면 이니셜을 새길 셔츠나, 4층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텀블러를 미리 챙겨 가면 좋다. 

‘이음피움 봉제역사관’ 전시실에선 ‘재봉틀의 변화’ 등 봉제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정면 스크린 앞에는 또 한 대의 오래된 재봉틀이 놓여있고, 이 재봉틀의 휠을 돌리면 옷 한 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볼 수 있는 인터랙티브 영상이 돌아간다.
‘이음피움 봉제역사관’ 전시실에선 ‘재봉틀의 변화’ 등 봉제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정면 스크린 앞에는 또 한 대의 오래된 재봉틀이 놓여있고, 이 재봉틀의 휠을 돌리면 옷 한 벌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볼 수 있는 인터랙티브 영상이 돌아간다.

여행작가 유성문은 길에서 길의 내력을 들춰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겨왔다. 그 내력과 사연은 먼빛이 되어 다시 그를 길로 내세운다. ‘길에서 길을 묻다’(경향신문), ‘사람의 길’(주간경향) 등 오랫동안 길과 사람 이야기를 써왔다. 문학관기행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를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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