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걷는 청계천
지금으로부터 80여년 전, 소설가 구보씨는 청계천변에 있는 집을 나선 뒤 광교 네거리에서부터 무려 열두 시간 이상을 이곳저곳 돌아다니다가 새벽 두시가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가는 하루를 시작한다. 당시 청계천은 남촌과 북촌을 가르는 경계이자, 도시의 중심과 주변이 혼재하는 공간이었다. 또한 ‘도시적 삶에 편입해 있는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면서도, 동시에 농촌에서 유리된 농민들이 도시로의 꿈을 안고 살아가는 공간’(민족문학사연구소, <춘향이 살던 집에서 구보씨 걷던 길까지>)이기도 했다. 오늘, 소설가 구보씨가 새로 복원된 청계천을 따라 다시 걷는다면 그 하루는 어떤 하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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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발표된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한 소설가가 서울거리를 배회하면서, 거기서 만난 도시풍경과 사람들에 반응하며 변화하는 내면의식을 그려내고 있다. 당대 지식인의 무기력한 자의식에 비친 일상의 모습을 형상화한 이 작품은 근대 모더니즘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조선의 한양정도(漢陽定都) 당시 청계천의 명칭은 ‘개천(開川)’이었다. ‘맑은 시내(淸溪)’가 아니라 그냥 열린 하천이었다. 홍수가 나면 민가가 침수되는 물난리를 일으켰고, 평시에는 오수가 괴어 매우 불결했다. 태종이 개거공사(開渠工事)를 벌여 처음으로 치수사업을 시작한 후 세종 때 들어 생활하천으로 결정되었으며, 이때부터 청계천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도성에서 배출되는 많은 생활쓰레기를 씻어내는 하수기능으로써 도성 전체를 ‘깨끗하게 하는 시내’가 되었다.
구보가 고된 하루의 발걸음을 시작한 광교는 ‘광통교’로도 불렸다. 본래 흙과 나무로 만든 다리였는데, 홍수로 인한 유실이 심해지자 태종 때 정릉의 석물을 이용하여 돌로 다시 만들었다. 정릉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으로, 본래 정동에 있던 능을 지금의 정릉으로 이전하면서 남은 석물들로 광교를 새로 축조했다고 한다. 남은 석물들을 이용했다고는 하지만, 생전부터 신덕왕후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사후 후궁으로 강등시키기까지 했던 태종이었기에 과연 그뿐일까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청계천은 산업화의 와중에서 한 사람의 이름을 깊이 아로새겨 넣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청계천과 평화시장 일대에서 봉제노동자로 자라난 이 청년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제 몸을 불살라 마침내 ‘청계천의 꽃’이 되었다. 1970년, 그의 나이 스물셋이었다. 지난 4월 30일, 청계천 수표교 가까이에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기념관’이 문을 열었다. 그가 분신한 평화시장 앞 버들다리에 반신동상이 세워진 지 14년만이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던 그의 외침은 기념관 외벽을 장식한 자필글씨들에 스며있고, 그 아래 청계천은 여전히 소리 없이 흐르고 있다.
청계천에 기대 세워진 세운상가 역시 한 시대의 명암을 간직하고 있다. 1968년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로 건설된 세운상가의 이름에는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인다”는 뜻이 담겨져 있을 만큼 압축성장시대 도시제조업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기성세대에게는 소위 ‘빽판(정품을 복제한 LP음반)’이나 ‘빨간책(음란소설)’, ‘문화영화(포르노테이프)’ 등의 불법·복제물의 은밀한 거래장소로 추억되기도 하지만, ‘만들고 고치지 못할 것이 없다’할 정도로 거의 장인에 가까운 세운상가 메이커들의 역할은 산업화의 과정에서 분명 지대한 것이었다.
잠시 길이 어긋났던 구보씨와 청계천 버들다리 전태일 반신상 앞에서 만난다. 2005년 열린 이 기념상 제막식에서,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이루어달라’는 아들의 유언에 따라 평생을 노동운동에 헌신해온 이소선은 전태일의 반신상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렸다.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불리던 그녀마저 2011년 세상을 떠난 뒤 버들다리 전태일의 표정은 한결 어둑해진 듯했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하루를 떠돈 구보가 이윽고 자신보다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이제는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생활하리라는 다짐을 하며 집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이렇게 밤늦게 어머니는 또 잠자지 않고 아들을 기다릴 게다. 우산을 가지고 나가지 않은 아들에게 어머니는 또 한 가지의 근심을 가질 게다. 구보는 어머니의 조그만, 외로운, 슬픈 얼굴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제 자신 외로움과 또 슬픔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된다. 구보는 거의 외로운 어머니를 잊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아들을 응당 왼 하루, 생각하고 염려하고, 또 걱정하였을 게다. (…) 이제 나는 생활을 가지리라. 생활을 가지리라. 내게는 한 개의 생활을, 어머니에게는 편안한 잠을….
-박태원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중에서
-샛길로 : 광장시장
조선시대 배오개시장의 명맥을 잇고 있는 광장시장은 오랜 전통을 가진 재래시장이다. 시장의 운영주체인 광장주식회사는 1904년에 설립하여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 중 하나이기도 하다. 광장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청계천에 있던 ‘광교(廣橋)’와 ‘장교(長橋)’로, 시장의 위치가 이 두 다리 사이에 있다고 하여 붙인 것. 처음 ‘광장(廣長)’이었다가 훗날 널리 담는다는 의미의 ‘광장(廣藏)’으로 바꿨다. 다만 1905년에 시장 개설허가를 받을 때에는 ‘동대문시장’이라는 명칭을 썼다고 한다.
원래 한복 등 포목상가로 유명하던 곳이었는데, 지금의 ‘북새통’ 시장으로 바꾸어놓은 것은 아무래도 그 유명한 ‘먹거리골목’이다. 빈대떡과 ‘마약김밥’으로 불리는 꼬마김밥 등이 입소문을 타면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하고, 거기에 외국인 관광객들까지 가세하면서 한때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연출하기도 했다. 게다가 광장시장의 명물이 빈대떡이다 보니 다른 시장과는 다르게 오히려 비가 오면 먹거리골목 쪽에 더 사람이 몰리는 기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다가는 진짜 ‘광장(廣場)’으로 이름을 바꿔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여행작가 유성문은 길에서 길의 내력을 들춰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겨왔다. 그 내력과 사연은 먼빛이 되어 다시 그를 길로 내세운다. ‘길에서 길을 묻다’(경향신문), ‘사람의 길’(주간경향) 등 오랫동안 길과 사람 이야기를 써왔다. 문학관기행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를 펴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