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골한옥마을과 한국의집

허생은 묵적골에 살았다. 곧장 남산 밑에 이르면 우물 위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서있고, 사립문이 은행나무를 향하여 열렸는데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허생은 글 읽기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삯바느질을 해 입에 풀칠을 했다. 하루는 그 처가 몹시 배가 고파서 울먹이며 말했다.
“당신은 평생 과거에 나가지 않으니 글을 읽어 무엇 합니까?”
허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 독서에 익숙하지 못하다오.”
“그럼 장인 일도 있잖아요?”
“장인 일은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겠소?”
“장사도 있지 않나요?”
“장사는 밑천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소?”
처는 마침내 성이 나서 꾸짖기를
“밤낮으로 글을 읽더니 배운 게 단지 ‘어찌 하겠소?’란 말씀이오?”
-박지원 ‘허생전’ 중에서

‘딸깍발이’는 가난한 선비를 낮잡아 이르는 말이다. 옛날 서울 남산골에 살던 선비들이 가난하여 맑은 날에도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나막신을 신고 다닌 데서 유래했다. 이곳에 살던 선비들은 비록 벼슬도 못하고 빈궁하게 지냈지만, 그 기개만큼은 대단했다. 

겨울이 오니 땔나무가 있을 리 만무하다. 동지 설상(雪上) 삼척 냉돌에 변변치도 못한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으니, 사뭇 뼈가 저려 올라오고 다리 팔 마디에서 오도독 소리가 나도록 온몸이 곧아오는 판에, 사지를 웅크릴 대로 웅크리고 안간힘을 꽁꽁 쓰면서 이를 악물다 못해 박박 갈면서 하는 말이 “요놈, 요 괘씸한 추위란 놈 같으니. 네가 지금은 이렇게 기승을 부리지마는 어디 내년 봄에 두고 보자” 하고 벼르더라는 이야기가 전하지만, 이것이 옛날 남산골 ‘딸깍발이’의 성격을 단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이야기다. 사실로는 졌지마는 마음으로는 안 졌다는 앙큼한 자존심, 꼬장꼬장한 고지식,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을 안 쬔다는 지조, 이 몇 가지가 그들의 생활신조였다. -이희승 ‘딸깍발이’ 중에서

‘남산골샌님 역적 바라듯’이라는 속담도 있다.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어 벼슬에 오를 길이 막막하니 혹시 역모라도 일어나 그 참에 벼슬자리나 얻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을 두고 이른 말로, 요행만 바라는 일에 대한 비아냥이 담겨있다. 

남산골한옥마을은 1989년 ‘남산 제모습찾기 운동’의 일환으로 서울시가 옛 수도방위사령부 부지를 인수하여 조성되었고, 1998년 4월 18일 공식 개장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정변세력의 보호를 목적으로 창설된 수방사(당시 수도경비사령부)는 1979년 12.12 군사반란 때에는 전투병력 대부분을 지휘하던 장세동(30경비단장), 김진영(33경비단장), 조홍(헌병단장) 등이 직속상관인 장태완 사령관을 배신하고 반란의 주축을 이루기도 했다. 장태완이 쫓겨난 이후 사령관직은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노태우가 꿰찼다. 지금도 한옥마을 내에 남아있는 충정사는 노태우가 사령관 재직 당시 건립한 절이다.

남산골한옥마을은 숱한 곡절을 거쳐 1989년부터 시작된 ‘남산 제모습찾기 운동’에 의해 간신히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남산골한옥마을은 숱한 곡절을 거쳐 1989년부터 시작된 ‘남산 제모습찾기 운동’에 의해 간신히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면 더 기가 막히다. 1910년 조선을 합병한 일제는 남산 주변에 조선 통치를 위한 조직들을 하나씩 주둔시키기 시작한다. 남산골샌님들에 의해 ‘청학동’으로 일컬어지던 이곳에는 일본군 헌병대 본부가 자리 잡았다. 기미년 3.1 만세운동 때에는 만세행렬이 본정(本町)을 거쳐 그때까지는 남산에 있던 총독부를 향해가니 일제 헌병대는 무자비하게 시위대를 살상하기도 한다. 이처럼 남산골은 일제 헌병대 본부, 군사정권 수도방위사령부를 거쳐 근년에야 ‘한옥마을’이란 이름을 통해 간신히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옛 청학동의 모습도, 남산골샌님의 자취도 가뭇하기만 하다.

남산골한옥마을의 근원은 옛 목멱산(남산) 아래 붓골(필동), 묵적골(묵정동)에서 유래한다. 예전에는 남산의 북록(北麓)에서 냇물이 흘러내리던 아름다운 골짜기 마을이었다고 한다.
남산골한옥마을의 근원은 옛 목멱산(남산) 아래 붓골(필동), 묵적골(묵정동)에서 유래한다. 예전에는 남산의 북록(北麓)에서 냇물이 흘러내리던 아름다운 골짜기 마을이었다고 한다.

한옥마을에는 4채의 조선말 대표적 한옥이 옮겨오고 1채는 재현되었다.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 가옥, 삼청동 오위장 김춘영 가옥, 관훈동 민씨 가옥,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은 옮겨왔고, 재현한 옥인동 윤씨 가옥 등 5채의 단아한 한옥이 자리 잡고 있다. 다양한 체험거리도 마련되어 있다. 한옥 5채를 활용하여 한옥 실내공간을 체험하면서 동시에 한국 전통문화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다. 한복 입기, 규방공예 체험과 함께 전래공연과 매사냥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그밖에도 천우각 맞은편 원두막에서는 짚공예 시연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천우각 무대에서는 태권도 시범공연과 체험행사에 참여할 수 있다. 

천우각에서의 태권도 공연. 한옥마을 앞마당에는 옛 정자 ‘천우각(泉雨閣)’을 복원해놓았으며, 그 앞으로는 ‘청학지(靑鶴池)’라는 연못도 팠다. <동국여지비고>에는 ‘금위영(禁衛營)의 남별영 안에 천우각이 있는데, 시냇물에 걸쳐 집을 지어서 여름철 피서에 좋다’고 나와 있다.
천우각에서의 태권도 공연. 한옥마을 앞마당에는 옛 정자 ‘천우각(泉雨閣)’을 복원해놓았으며, 그 앞으로는 ‘청학지(靑鶴池)’라는 연못도 팠다. <동국여지비고>에는 ‘금위영(禁衛營)의 남별영 안에 천우각이 있는데, 시냇물에 걸쳐 집을 지어서 여름철 피서에 좋다’고 나와 있다.

마을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오늘날의 시민생활과 서울특별시의 모습을 대표할 수 있는 문물 600점을 담은 캡슐을 지하 15m에 수장해둔 ‘서울천년 타임캡슐광장’이 있다. 서울시가 고려시대 수도였던 개경에서 조선시대 때 한양으로 천도한 지 600년을 기념하여 1994년 만든 타임캡슐로, 천도 1000년을 맞이하게 되는 서기 2394년에 후손들에 의해 공식 개봉될 예정이다. 기저귀, 팬티스타킹, 워드프로세서(아래아한글 2.5), 피임기구(콘돔), 불온삐라, 삐삐 등에다 김건모 앨범도 들어있다. 그런데 ‘서편제’까지는 몰라도 ‘블루시걸’ 비디오테이프는 좀…. 하긴 내가 그걸 다시 볼 일은 없겠지만. 이 글을 읽는 이들도.

‘서울천년 타임캡슐광장’에는 보신각 종 모양을 본 딴 타임캡슐이 매설되어 있다. 부식방지를 위해 진공처리를 했고, 1994년 당시 사용하던 일상용품 및 유물 등이 들어있다. 개봉일은 2394년 11월 29일이다.
‘서울천년 타임캡슐광장’에는 보신각 종 모양을 본 딴 타임캡슐이 매설되어 있다. 부식방지를 위해 진공처리를 했고, 1994년 당시 사용하던 일상용품 및 유물 등이 들어있다. 개봉일은 2394년 11월 29일이다.

남산골한옥마을 곁에 자리한 한국의집 역시 만만치 않은 영욕의 세월을 보냈다. 원래 조선시대 집현전 학자인 박팽년의 사저가 있던 곳으로, 1957년 ‘한국의집’으로 명명하여 개관하기까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행정·사법을 통괄하던 정무총감의 관저로, 광복 후에는 정권이양이 이루어지던 현장으로, 6.25전쟁 당시에는 미8군 사령관의 숙소로 사용되며 역사의 질곡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현재의 건물은 1980년 국가무형문화재 대목장 신응수가 경복궁 자경전을 본떠 건축하여 다음해 개장했다. 주요시설은 주 건물인 해린관과 가락당, 문향루, 녹음전, 청우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의집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전통생활과 문화를 소개할 목적으로 한국문화재재단에서 운영 중이며, 전통가옥과 생활공간, 궁중음식, 수공예품, 민속음악, 전통무용, 전통혼례 등 한국의 아름다움을 한 곳에서 즐길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한국의집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전통생활과 문화를 소개할 목적으로 한국문화재재단에서 운영 중이며, 전통가옥과 생활공간, 궁중음식, 수공예품, 민속음악, 전통무용, 전통혼례 등 한국의 아름다움을 한 곳에서 즐길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이다.

√ 매주 금~일요일 13:00/15:00시 남산골한옥마을 천우각 야외무대에서 열리는 태권도 상설공연은 혹서기인 6월 3일~8월 29일 기간에는 열리지 않는다. 8월 30일부터 재개되는 공연은 10월까지 계속된다. 

-샛길로 : 예장동에 드리운 남산의 그늘

남산골한옥마을 후문을 빠져나와 삼일대로 위에 설치된 육교를 넘으면 남산의 또 다른 그늘을 만난다. 남산자락 예장동 곳곳에 남산의 정기를 가리던 시대의 아픔이 산재해 있는 것이다. 먼저 옛 일제 통감관저 터. 한일합병조약의 체결장소, 즉 경술국치의 현장이었던 이곳은 오랫동안 잊혀진 장소로 남아 있다가 근래 들어서야 표석이 들어섰다. 일제는 ‘왜성대(倭城臺)’라 불린 이곳 통감(후에 총독) 관저에서 이완용을 상대로 경술늑약을 체결했다. 
통감관저 터 일원에는 2016년 8월 ‘기억의 터’가 조성되었다. 일본군 위안부를 기리는 공원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가 전 세계적 여성문제로 떠올랐음에도 서울 시내에 그 아픔을 기리는 공간이 없다는 지적에서 추진된 공간이다. 경술국치의 현장에 세워져 그 의미를 더하고 있는 ‘기억의 터’ 조성에는 초등학생부터 위안부 피해 할머니, 시민단체 등 1만 9755명이 범국민 모금운동 ‘기억의 터 디딤돌 쌓기’를 통해 참여하기도 했다. 

‘기억의 터’에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 247명의 이름과 증언을 시기별로 새긴 ‘대지의 눈’과,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글귀가 4개 국어(한글·일본어·영어·중국어)로 새겨진 ‘세상의 배꼽’ 등이 설치되어 있다.
‘기억의 터’에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 247명의 이름과 증언을 시기별로 새긴 ‘대지의 눈’과,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글귀가 4개 국어(한글·일본어·영어·중국어)로 새겨진 ‘세상의 배꼽’ 등이 설치되어 있다.

한때 남산은 공포의 상징, 아니 공포 그 자체였다. ‘남산’은 중앙정보부의 다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5.16 군사정변 이후 정변 주체들에 의해 설립된 중앙정보부는 국가권력 그 이상이었다. 남산 예장동 자락에 들어선 중앙정보부는 한번 들어가면 제 발로 나오기 힘들다는 속칭 ‘지하실’로 악명이 높았는데, 얼마나 사람들을 혹독하게 다루었던지 그곳에서 고문을 받은 사람 중에는 평생 꿈에서까지 괴롭힘을 당할 정도였다. 
1995년 중앙정보부의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가 서초구로 이전하고, ‘남산 르네상스’ 계획을 세우면서 일부 건물이 철거되거나 현재 서울시 제2청사와 제3청사, 서울시 소방재난본부, TBS 교통방송, 서울유스호스텔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2017년 서울시에서는 ‘지하실’이 있던 옛 중앙정보부 6국 건물을 해체하면서 부끄러운 역사를 더 이상 외면하지 말고 기억하자는 뜻을 담아 ‘기억 6’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현재 ‘문학의집·서울’이 들어서 있는 건물은 원래 중앙정보부장 공관이었다. 이 집을 문학의집으로 개조할 당시 2층 다락방에는 기관단총 거치대가 그대로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과거 중앙정보부 부지 일대에는 ‘인권숲’이라는 이름으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현재 ‘문학의집·서울’이 들어서 있는 건물은 원래 중앙정보부장 공관이었다. 이 집을 문학의집으로 개조할 당시 2층 다락방에는 기관단총 거치대가 그대로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과거 중앙정보부 부지 일대에는 ‘인권숲’이라는 이름으로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여행작가 유성문은 길에서 길의 내력을 들춰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겨왔다. 그 내력과 사연은 먼빛이 되어 다시 그를 길로 내세운다. ‘길에서 길을 묻다’(경향신문), ‘사람의 길’(주간경향) 등 오랫동안 길과 사람 이야기를 써왔다. 문학관기행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를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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