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모란을 유난히 좋아하던 김영랑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는 순수시를 남겼다. 마당에 삼백여 그루의 모란을 손수 심은 뒤, 모란이 피면 그토록 즐기던 술도 딱 끊고, 모란 향기에 흠뻑 취한 나날을 보냈다. 시인에게 있어 모란은 삶의 지표요, 가치의 전부였던 모양이다. 

모란은 예부터 부귀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설총(薛聰)의 『화왕계(花王戒)』에서도 모란은 꽃들의 왕으로 나온다. 강희안(姜希顔)은 원예서인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꽃을 9품으로 나누고 그 품성을 논할 때, 모란은 부귀를 취하여 2품에 두었다. 신부의 예복인 원삼이나 활옷에는 모란꽃이 수놓아졌고, 선비들의 책거리 그림에도 부귀와 공명을 간절히 바라는 모란꽃이 그려졌다. 왕비나 공주와 같은 귀족 여인들은 모란무늬의 옷을 입었으며, 가정집의 수병풍에도 모란은 빠질 수 없었다. 또, 미인을 평함에 있어 복스럽고 덕 있는 미인을 활짝 핀 모란꽃과 같다고 했다. 

‘모란꽃 피는 유월이 오면/ 또 한 송이의 꽃 나의 모란/ 추억은 아름다워 밉도록 아름다워/ 해 마다 해 마다 유월을 안고 피는 꽃/ 또 한 송이의 또 한 송이의 나의 모란’(김용호의 시 ‘또 한 송이 나의 모란’ 중에서)

김용호 시인은 6·25전쟁 직후 피란살이에 시달리다 서울로 돌아온 뒤 가난했던 시절에 이 시를 썼다. 밉도록 아름다운 지난날을 그리는 시인의 애틋한 감정이 담긴 이 시는 시인이 가장 사랑했다는 계절, 유월을 읊은 노래이기도 하다. 1956년에 출간된 시집 『푸른 별』의 첫 머리에 이 시를 싣고 좋아했다는 그는 평소, “앞으로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시의 길을 떠나지 않는다는 가장 뚜렷한 증좌(證左)가 될 것이다. 시 속에서 나는 나의 생명의 불꽃이 필 것을 스스로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설령 이 시가 하잘것없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나에게 있어 얼마나 고귀하고 진실한 것이냐”는 말을 하곤 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뜬 지는 어느덧 46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 버렸다. 그러나 정열적이고 다정했던 그의 생명은 결코 꺼지지 않은 채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시는 가곡의 형태로 태어나 많은 사람들에게 애창되고 있다. 

1912년 마산에서 태어난 그는 『신인 문학』지에 ‘첫 여름밤에 귀 기울이다’로 등단, 『부동항』 『낙동강』 등 8권의 시집을 냈다. 김진균 선생이 시를 작곡한 것은 1969년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어느 음대생의 노트에서 우연히 이 시를 발견했다. 누구의 시인지도 모르고 읽어 내려가다가 ‘추억은 아름다워 밉도록 아름다워’란 구절에서 가슴이 뭉클해 옴을 느꼈다. 사라져 가는 청춘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달픈 감정, 그리고 지난날의 아름답던 추억이 함께 되살아났다.”고 그 무렵을 추억했다. 먼저 ‘추억은 아름다워 밉도록 아름다워’의 멜로디가 떠올랐고 잇따라 ‘모란꽃 피는 유월이 오면’의 멜로디가 저절로 나와 곧바로 오선지에 옮겼다고 한다. 

‘또 한 송이 나의 모란’은 김진균 선생 외에 조두남 선생이 이미 곡을 붙이기도 했는데, 1958년 어느 여름날 밤 우연히 손에 잡힌 시집에서 이 시를 보고 즉흥적으로 작곡했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작곡해 놓고 보니 시가 1절 뿐이라 성악곡으로는 너무 짧을 것 같아 김용호 시인에게 부탁, 두 달 뒤 2절 가사를 전해 받았다. 그래서 1절뿐이던 이 곡은 조두남 작곡가를 위해 보내 준 2절이 덧붙여진 것이다. 

하나의 시에 두 사람이 작곡한 가곡, ‘또 한 송이 나의 모란’은 우리가 석가탑과 다보탑을 놓고 저마다 그 독특한 감각을 느낄 수 있듯 결코 우열을 가름할 수 없는 것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기에 두 노래에 실린 이 시는 더욱 빛나 보이는 것이다. 김진균 선생의 곡은 메아리처럼 되풀이되어 시작되는 선율로 모란꽃을 보지 않고도 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준다. 이에 반해, 조두남 선생의 곡은 잔잔하면서도 때로는 파도와 같은 선율의 흐름이 가곡 ‘선구자’와 더불어, 그분의 아름다고 소박함을 풍겨 준다. 그러나 몇 번 씩을 불러 보아도 코끝이 시큰해짐은, 두 곡이 모두 서정적인 면에서 일치하며 어떤 이에게나 감정을 가지고 포근하게 감겨 오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성하(盛夏)의 계절, 우리 모두 ‘밉도록 아름다운 추억’에 한 번쯤 젖으며 무더위를 잠시나마 잊어 봄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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