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과 경리단길

조선시대 이곳에 ‘이태원(梨泰院)’이란 역원(驛院)이 있었다. 일대에 배나무가 많아 그렇게 불리기 시작했다. 이설(異說)도 있다. 당시 ‘이타인(異他人)’이라 불리던 일본인 전용 거주지가 조성되었던 곳으로, 그에서 이름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강간을 당해 아기를 낳은 비구니들이 모여 살았다는 이야기까지 전한다. 외인의 아이를 가졌다는 뜻에서 ‘이태원(異胎院)’이란 이름이 붙여졌다지만,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미 ‘이태원’이란 명칭이 쓰였기 때문에 근거는 없는 이야기다. 나중에 비유로 그렇게 불렸는지는 몰라도.

이태원은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외국인마을로 인식되었다. 클럽 등 놀거리는 제법 있었으나, 내국인들이 선뜻 놀러간다고 말하는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연예인이 운영하는 맛집 및 경리단길 등이 언론을 타면서 수요가 폭발, 이제는 홍대거리, 강남역 같은 이른바 ‘서울의 핫플레이스’로 자리 잡은 모양새다.
이태원은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전형적인 외국인마을로 인식되었다. 클럽 등 놀거리는 제법 있었으나, 내국인들이 선뜻 놀러간다고 말하는 곳은 아니었다. 그러나 2010년대 들어 연예인이 운영하는 맛집 및 경리단길 등이 언론을 타면서 수요가 폭발, 이제는 홍대거리, 강남역 같은 이른바 ‘서울의 핫플레이스’로 자리 잡은 모양새다.

참으로 어원이 가져다주는 의미는 사실보다 더 리얼하다. 역원은 조선시대에 길손이 머물던 공영숙소를 이른다. 이태원을 포함한 용산은 과거 한강의 물길이 닿는 교통의 요지이자 한양의 관문이었다. 이러한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용산에는 일찍부터 외국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조선시대 말에는 일제가 식민지 통치를 위한 군사기지를 용산에 두었고, 해방 후에는 그 자리에 미군이 주둔해왔다. 게다가 일제 때까지만 해도 이태원 일대에는 최대의 공동묘지가 들어서 있었다. 이태원에서 ‘생’과 ‘사’는 자타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었다.

‘성저십리(城底十里, 한양도성의 바깥지역)’에 속하던 용산의 이태원은 한양 최대의 공동묘지 지역이었다. 3.1만세운동 때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한 유관순 열사도 처음 이곳에 묻혔다. 그러나 일대가 일본군 군용지역으로 전환됨에 따라 망우리 등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실전(失傳)되고 말았다. 용산구에서는 옛 묘역(지금의 이슬람서울중앙성원 일원)이 바라보이는 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에 추모비를 세우고 열사의 넋을 기리고 있다.
‘성저십리(城底十里, 한양도성의 바깥지역)’에 속하던 용산의 이태원은 한양 최대의 공동묘지 지역이었다. 3.1만세운동 때 모진 고문 끝에 순국한 유관순 열사도 처음 이곳에 묻혔다. 그러나 일대가 일본군 군용지역으로 전환됨에 따라 망우리 등으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실전(失傳)되고 말았다. 용산구에서는 옛 묘역(지금의 이슬람서울중앙성원 일원)이 바라보이는 이태원부군당역사공원에 추모비를 세우고 열사의 넋을 기리고 있다.

용산 일대에 외국군이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이태원은 외국인, 외국 상품, 외국 문화의 집결지가 되었다. 특히 6·25전쟁을 거친 후 미8군사령부가 인근에 위치하면서 미군들의 위락지대로 번창하기 시작했고, 점차 외국인 관광객의 쇼핑과 관광의 명소로까지 발전했다. 이들에 의해 이루어진 클럽문화가 지금 이태원의 원형을 만들었고, 이들을 통해 소개된 외래문화는 금세 한국사회의 새로운 트렌드가 되기도 했다. 세계 각국의 요리는 물론이고, 영국식 펍문화와 노바다야끼의 유행도 이곳에서 비롯했다. 소위 ‘캣콜링’과 ‘게이바’도 이태원이 낳은 신종 이색(異色)이었다.

이태원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소방서에서 언덕으로 올라가면 보이는 이슬람서울중앙성원이다. 한국에 있는 무슬림들에게는 성지와 다름없는 이곳은 1970년대 남북냉전 시 중동지역의 지원을 얻기 위해 정부가 모스크 건립을 제안하면서 중동국가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만들었다. 성전 출입 시 금지사항(짧은 치마, 반바지, 깊게 파인 옷, 비치는 옷 등)까지 두고 있는 곳이지만 정작 발아래로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니.
이태원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소방서에서 언덕으로 올라가면 보이는 이슬람서울중앙성원이다. 한국에 있는 무슬림들에게는 성지와 다름없는 이곳은 1970년대 남북냉전 시 중동지역의 지원을 얻기 위해 정부가 모스크 건립을 제안하면서 중동국가들이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만들었다. 성전 출입 시 금지사항(짧은 치마, 반바지, 깊게 파인 옷, 비치는 옷 등)까지 두고 있는 곳이지만 정작 발아래로는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지니.

어쨌든 이태원에서 나는 언제나 이타인이었다. 예전부터, 아니 원래부터 나는 이태원에 갈 때마다 왠지 쑥스럽고 어색하기만 했다. 걸음걸이부터 불안했고, 혹시 지나는 외국인이 말이라도 붙이지나 않을까 은근 겁이 나기도 했다. 어떤 친구놈은 아무렇지도 않게 ‘아점(아침 겸 점심)’을 하러 간다기도 하고(그걸 ‘브런치’라고 한다지), 또래 계집애들조차 서슴없이 영어회화도 배우고, 또 어쩌고 한다는데…. 나는 이방의 거리에서 이방인들보다 더 자연스러운 친구들을 볼 때면 마냥 신기하고 부럽기만 할 뿐이었다. 

왼쪽/이태원은 다양한 문화권의 음식을 접할 수 있어서 식도락가들과 포스팅꺼리에 목마른 맛집블로거들을 유혹한다. 미국, 일본은 물론이고, 유럽. 중동, 동남아시아, 중남미 등과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에서 온 이들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노점상이 즐비하기에 본고장 맛을 국내에서 유일하게, 한꺼번에 죄다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른쪽/이태원 앤틱가구거리는 인사동이나 답십리 등과는 결이 다른 골동품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주로 외국인이거나 외국인 취향의 업소 주인들로, 골동품상가라기보다는 인테리어상가에 가깝다.
왼쪽/이태원은 다양한 문화권의 음식을 접할 수 있어서 식도락가들과 포스팅꺼리에 목마른 맛집블로거들을 유혹한다. 미국, 일본은 물론이고, 유럽. 중동, 동남아시아, 중남미 등과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지에서 온 이들이 운영하는 식당이나 노점상이 즐비하기에 본고장 맛을 국내에서 유일하게, 한꺼번에 죄다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른쪽/이태원 앤틱가구거리는 인사동이나 답십리 등과는 결이 다른 골동품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주로 외국인이거나 외국인 취향의 업소 주인들로, 골동품상가라기보다는 인테리어상가에 가깝다.

이태원은 1990년대 중반부에 접어들며 심야영업 금지, 미군부대 이전, 강남·홍대 등이 번성에 따라 급격히 쇠락하는 듯했다. 그런 이태원에 아연 활기를 불어넣으며 ‘제2의 전성시대’를 연 것이 바로 ‘경리단길’의 부상이었다. 국군재정관리단(옛 육군중앙경리단)이 위치해 있어 이름 붙은 경리단길은 2013~14년 무렵부터 개성 넘치고 이국적인 분위기의 가게들, 특히 당시로선 드물던 수제맥줏집 등이 속속 들어서면서 다시 젊은이들이 북적거리는 ‘핫플레이스’로서 제자리를 찾은 것이다. 

전국적인 ‘O리단길’ 유행의 원조이기도 한 경리단길은 항시 새로운 것에 목말라하는 2030 밀레니얼 세대가 개성과 전문성을 갖춘 이곳을 찾기 시작하면서 이태원의 ‘제2전성시대’를 열었다.
전국적인 ‘O리단길’ 유행의 원조이기도 한 경리단길은 항시 새로운 것에 목말라하는 2030 밀레니얼 세대가 개성과 전문성을 갖춘 이곳을 찾기 시작하면서 이태원의 ‘제2전성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경리단길의 봄은 짧았다. 2015년을 정점으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즉 ‘상권 내몰림’ 현상으로 기존 상인들이 급격한 임대료 인상을 감당하지 못하고 떠나면서 몇 년 사이 서울에서 공실률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물론 이 같은 현상이 이곳만의 경우도 아니고, 경리단길의 퇴조가 단지 비싼 임대료 때문만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신흥골목상권의 대명사였던 경리단길이 다시 젠트리피케이션의 대표지로 바뀌는 현실을 바라보는 심경은 자못 씁쓸하기만 하다.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참 무수한 길이 있다.  

25년 가까이 이태원에 살아오면서 이곳이 제2의 고향과도 같다는 방송인 홍석천은 최근 경리단길을 되살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지역 소상공인 및 건물주들과 진심을 다해 소통하다보니 서로 한층 가까워지고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면서 “경리단길은 분명 살아나고 있으며,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6월 말 쯤 ‘경리단길축제’도 열어볼 생각이라고. 그래, 힘내라 경리단길! 전국의 모든 소상공인들도.
25년 가까이 이태원에 살아오면서 이곳이 제2의 고향과도 같다는 방송인 홍석천은 최근 경리단길을 되살리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지역 소상공인 및 건물주들과 진심을 다해 소통하다보니 서로 한층 가까워지고 문제를 해결해보자는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면서 “경리단길은 분명 살아나고 있으며, 반드시 살아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6월 말 쯤 ‘경리단길축제’도 열어볼 생각이라고. 그래, 힘내라 경리단길! 전국의 모든 소상공인들도.

-샛길로 : 용산공원갤러리
외국군의 주둔은 이태원 일대의 성격을 규정하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지역 발전의 장애요소가 되기도 했다. 현재 이태원 일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이 평택으로 완전 이전하고, 그 자리에 계획대로 용산공원이 조성되면 이태원은 새로운 발전과 성격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서울시는 미군기지가 있던 자리를 243만㎡ 규모의 공원으로 조성하고, 각종 복합시설을 유치할 예정이다. 총 1조 2000억원을 투입해 2019년부터 조성하기 시작하여 2027년까지 단계적으로 완성해나갈 계획이다.

이태원부군당공원에서 내려다본 용산미군기지. 이곳에 ‘한국판 센트럴파크’라는 용산공원이 들어서면 용산과 이태원은 또 어떤 변화를 겪게 될까.
이태원부군당공원에서 내려다본 용산미군기지. 이곳에 ‘한국판 센트럴파크’라는 용산공원이 들어서면 용산과 이태원은 또 어떤 변화를 겪게 될까.

서울시는 용산공원 조성을 앞두고 캠프킴 부지 내 옛 USO(주한미군미국위문협회) 건물에 ‘용산공원갤러리’를 열었다. 서울시와 주한미군 공동주관으로 서울역사박물관, 국가기록원, 용산문화원, 개인 등이 소장하고 있는 사진, 지도, 영상 등 총 60여 점이 전시되고 있다. 지난 73년 간 한·미 동맹의 상징이었던 용산기지의 역할, 한국전쟁 후 서울의 발전과 함께한 주한미군과의 관계와 공생발전 과정을 담았다. 이와 함께 용산미군기지 내 주요장소를 버스로 둘러볼 수 있는 ‘용산기지 버스투어’와 ‘용산기지 주변지역 워킹투어’도 실시하고 있다.

용산공원갤러리는 지하철 남영역 인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프로그램 참여는 용산문화원 홈페이지(버스투어) 및 서울시 공공서비스예약시스템(워킹투어)으로 신청하면 된다.
용산공원갤러리는 지하철 남영역 인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프로그램 참여는 용산문화원 홈페이지(버스투어) 및 서울시 공공서비스예약시스템(워킹투어)으로 신청하면 된다.

여행작가 유성문은 길에서 길의 내력을 들춰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겨왔다. 그 내력과 사연은 먼빛이 되어 다시 그를 길로 내세운다. ‘길에서 길을 묻다’(경향신문), ‘사람의 길’(주간경향) 등 오랫동안 길과 사람 이야기를 써왔다. 문학관기행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를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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