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전쟁기념관

전쟁은 오래 ‘기억’되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빨리 ‘망각’되어야 하는 것인가.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69년이 되었다. 그리고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래 세계사에 유례없는 최장 휴전기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실시간으로 그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용산 전쟁기념관은 한동안 명칭 문제로 논란을 벌였다. ‘기념’이니 ‘추모’니 부질없는 논쟁을 벌이다 ‘전쟁박물관’으로 개명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현 명칭을 선호하는 의견이 높아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론이 났다. 그리고 전쟁은 여전히 ‘메모리얼’되고 있다. 이젠 끝낼 때도 되지 않았는가. 아시아 최대 규모의 전쟁박물관이라는 용산 전쟁기념관 마당의 무수한 무기들을 바라보며 되뇌어본다. 무기여, 잘 가거라. 

용산 전쟁기념관은 1990년대에 육군본부가 충남 계룡대로 이전하면서 남는 부지에 지은 박물관으로, 1991년에 착공하여 1994년 6월 개관했다. 이름 그대로 한국 관련 전쟁들이 메인 테마인 박물관으로, 야외에는 각종 항공기, 장갑차량, 화포 등이 전시되어 있다. 내부로 들어가면 호국추모실, 전쟁역사실, 6.25전쟁실, 해외파병실, 국군발전실 등으로 이어진다. ‘그 옛날 대륙을 석권했던 선조들의 웅혼한 기상으로부터, 전 국민이 단결하여 침략자를 응징했던 승전의 역사들…’ 운운의 안내문에서 이미 짐작하듯 ‘기억’보다는 ‘과시’에 더 가깝다. 그것도 좀 민망한. 딸린 시설로는 어린이박물관, 웨딩홀이 있다. 이유야 다 있겠지만 이 또한 좀 그렇다.

전쟁기념관 앞 광장에는 한국전쟁 당시 UN의 이름으로 대한민국을 지원한 16개국과 대한민국 육군, 해군 및 해병대, 공군 예하 부대들의 깃발들이 걸려 있다. 모든 부대는 아니고 한국전쟁 당시 참전부대들 위주이다.
전쟁기념관 앞 광장에는 한국전쟁 당시 UN의 이름으로 대한민국을 지원한 16개국과 대한민국 육군, 해군 및 해병대, 공군 예하 부대들의 깃발들이 걸려 있다. 모든 부대는 아니고 한국전쟁 당시 참전부대들 위주이다.

용산 나들이의 출발점이 되는 용산역은 나이든 (남성)세대들에겐 ‘용사의 집’ 쯤으로 추억된다. 일제강점기 일본군의 주둔지였던 이래 미군기지, 국방부 등이 위치하면서 용산은 항시 군사지구였고, 용산역은 군용열차가 주로 운행하는 등 군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역이었다. 당연히 역 주위에 군장점 등 군대와 관련된 가게들이 많았고, 특히 군복지시설인 ‘용사의 집’은 군인 관련 물품뿐 아니라 식당, 숙소 등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는 여행 장병들의 명소였다. ‘용사의 집’은 2017년 그 자리에 1300억 원을 들여서 30층짜리 육군호텔을 재건립한다는 계획에 따라 헐리고 말았지만, 지금도 가끔 돈가스 등 ‘옛날 경양식’ 스타일을 고수하던(그래서 추억으로 찾던) 그곳의 양식당이 그립기도 하다. 

왼쪽/2017년 8월 12일 광복절을 앞두고 양대 노총과 시민단체 등이 힘을 모아 용산역 광장에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세웠다. 용산역은 일제강점기 강제 징집된 조선인들이 집결한 곳으로, 끌려온 노동자들은 일본과 사할린, 쿠릴열도 등지의 광산, 토목공사 현장에서 착취당했다. 오른쪽/용산역은 지금도 여전히 휴가 장병 등 군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역이어서 구내에 TMO(여행장병안내소)가 위치하고 있기도 하지만, 지금의 이용 장병들의 모습은 분명 예전 휴가 나와서도 군기에 바짝 절어있던 그런 모습은 아니다.
왼쪽/2017년 8월 12일 광복절을 앞두고 양대 노총과 시민단체 등이 힘을 모아 용산역 광장에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세웠다. 용산역은 일제강점기 강제 징집된 조선인들이 집결한 곳으로, 끌려온 노동자들은 일본과 사할린, 쿠릴열도 등지의 광산, 토목공사 현장에서 착취당했다. 오른쪽/용산역은 지금도 여전히 휴가 장병 등 군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역이어서 구내에 TMO(여행장병안내소)가 위치하고 있기도 하지만, 지금의 이용 장병들의 모습은 분명 예전 휴가 나와서도 군기에 바짝 절어있던 그런 모습은 아니다.

예전 휴가 장병들을 붙잡던 홍등가 주변으로 포장마차가 즐비하던 용산역 일대는 용산지구 재개발에 따라 그야말로 상전벽해를 실감케 하는 곳이 되었다. 아이파크몰이 들어선 용산역을 시발로 일대에 대형 건물이 속속 들어서면서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바꾸고 있다. 그나마 철도회관 부근 골목 등이 옛 동네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지만, 그조차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그중 한국여성단체협의회 건물 지하에 있는 뿌리서점은 내가 용산에 갈 때마다 한 번씩 들리는 헌책방이다. 이 책방의 주인께서는 천안이 고향으로, 먹고살기 위해 서울에 올라와 갖은 일을 다 하다 용산에서 책방을 낸 지만도 45년째. 언젠가 통일이 되면 남북 뭇 백성들이 읽던 책들을 한데 모은 헌책방을 내는 게 꿈이라며 웃곤 하셨는데, 그 꿈을 이루기도 전에 주인은 몸져눕고 책방을 물려받은 아들은 재개발을 걱정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책이 주인을 기다립니다.’ 어쩌면 매일 파는 책보다 고물상 등을 통해 사들이는 책들이 훨씬 더 많았을 책방의 주인은 이제 몸이 안 좋아 더 이상 책방에 나오지 못하고, 오랜 시간 친구가 되었던 동네 어르신들만 책방 앞에 나앉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책이 주인을 기다립니다.’ 어쩌면 매일 파는 책보다 고물상 등을 통해 사들이는 책들이 훨씬 더 많았을 책방의 주인은 이제 몸이 안 좋아 더 이상 책방에 나오지 못하고, 오랜 시간 친구가 되었던 동네 어르신들만 책방 앞에 나앉아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도시와 시절의 변화에 따라 자꾸만 뒷전으로 밀려나는 처지이기는 용산전자상가도 마찬가지이다. 1987년 용산 청과물시장이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으로 이전함에 따라 당시 청계천 세운상가에 입주해 있던 전자제품 판매 점포들이 옮겨오면서 형성된 용산전자상가는 오랫동안 한국의 대표적인 전자상가이자 동북아지역 최고의 전자상가로 위세를 떨쳤다. 하지만 ‘용팔이’로 상징되는 호객행위와 바가지 등의 악명에다 테크노마트나 국제전자센터 등이 부상하면서 그 위세가 예전만 못하다. 그래도 역사가 오래된 데다 워낙 좋은 위치다보니 여전히 서울의 대표적 전자상가로 자리 잡고 있고, 최신 전자제품과 70년대 조의 쇠락한 부품가게가 공존하는 분위기를 오히려 매력으로 느끼는 이들도 많다. 전자랜드를 제외한 전자상가 역시 재개발을 눈앞에 두고 있다.

용산 전자랜드는 1988년 최초 개장 시에는 본관만 있었지만, 1994년 본관 옆에 신관을 개장했다. 멀티플렉스 등이 위치하는 신관은 개장 시 ‘조립PC 업체가 하나도 없다’는 이유로 이슈가 되었다. 전자랜드 건물에서도 거의 모든 물품을 팔지만 다양성은 적은 편이다.
용산 전자랜드는 1988년 최초 개장 시에는 본관만 있었지만, 1994년 본관 옆에 신관을 개장했다. 멀티플렉스 등이 위치하는 신관은 개장 시 ‘조립PC 업체가 하나도 없다’는 이유로 이슈가 되었다. 전자랜드 건물에서도 거의 모든 물품을 팔지만 다양성은 적은 편이다.

용산전자상가 바로 북쪽에 위치한 신계역사공원은 천주교 당고개 순교성지를 품고 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천주교 신자 열 명이 이곳에서 처형당해 서소문성지, 새남터 다음으로 많은 아홉 명의 성인이 탄생한 곳이다. 특히 최경환 성인의 부인이며 우리나라 두 번째 사제였던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 마리아는 잠시 배교(背敎)를 했다는 이유로 성인의 반열에 오르지 못하였지만, 2014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諡福)되었다. 그녀가 배교를 한 이유는 마카오로 유학을 가 있던 맏아들 최양업 신부를 제외한 다섯 명의 자식들과 함께 옥에 갇힌 후 당시 세 살짜리 막내가 빈 젖을 빨다가 굶어죽자 나머지 네 명의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같이 풀려난 아이들이 동냥 나간 사이 스스로 다시 옥으로 돌아와 갇히고, 마침내 다른 신자들과 함께 처형되고 만다. 

이성례 마리아가 참수되기 하루 전 살아남은 네 명의 아이들은 동냥한 쌀과 돈 몇 푼을 가지고 희광이(사형집행인)에게 찾아가 자신들의 어머니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단칼에 베어줄 것을 부탁하고, 이에 감동한 희광이는 밤새 칼을 갈아 그 약속을 지킨다. 당고개성지의 성모상은 아이들을 안고 있는 한복 차림의 어머니 모습이다.
이성례 마리아가 참수되기 하루 전 살아남은 네 명의 아이들은 동냥한 쌀과 돈 몇 푼을 가지고 희광이(사형집행인)에게 찾아가 자신들의 어머니가 고통을 당하지 않도록 단칼에 베어줄 것을 부탁하고, 이에 감동한 희광이는 밤새 칼을 갈아 그 약속을 지킨다. 당고개성지의 성모상은 아이들을 안고 있는 한복 차림의 어머니 모습이다.

-샛길로 : ‘열정도’를 아시나요  
청년들의 열정으로 뜨거운 섬이 있다. 열정도(熱情島)-. 용산구 백범로의 옛 인쇄소골목은 해가 지면 하나둘 모여드는 젊음들로 불을 밝힌다. 원래는 인쇄소와 출판사, 작은 공장들이 모여 있던 골목이다. 한때 제법 북적거렸던 이곳은 인쇄업이 사양산업이 되고 재개발까지 무산되면서 하나둘 떠나고 텅 빈 거리로 남았다. 주변엔 아파트와 고층빌딩이 들어섰지만 인쇄소골목은 마치 외딴섬처럼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잊혀져 있었다. 그런 골목에 아연 활기를 되살린 것은 청년들의 창업 열기였다. 
2014년부터 일단의 청년들이 오래된 건물을 개조해 작은 가게를 차리기 시작했다. 자본금이 부족한 ‘청년장사꾼’들은 저마다 특색 있는 아이디어로 승부를 걸었다. 직접 공사도 하고 도색작업을 하며 인테리어 비용을 줄이고, 점심시간이면 인근 역에서 전단지를 뿌리고 SNS 등을 통해 열심히 홍보도 했다. 처음 1년간은 대부분의 가게가 적자였으나 몇몇 방송매체에 청년상인들의 사연이 소개되며 거리를 찾는 손님이 늘기 시작했다. 입소문을 타면서 다른 청년상인들도 골목에 자리를 잡아갔고, 6개로 시작한 가게는 어느새 40여개로 늘어났다.
‘주꾸미 팔아 장가가자’는 주꾸미집도 있고, 2층 술집 ‘다가구주(酒)택’도 있다. ‘생각나서 떡볶이’집도 있고, ‘곱상’한 곱창집도 있다. ‘최신 칼라 18비트 전자 콤퓨타-게임’을 자랑하는 오락실 옆은 ‘치킨혁명’집이다. 아늑한 커피숍에 아기자기한 공방도 빠지지 않는다. 초록 오토바이에 초록 헬멧을 쓴 ‘배달의 민족’ 배달통엔 ‘안전운전, 공복주의’라 적혀있다. 주말이면 ‘공장’이란 이름의 야시장도 연다. 밤마다 목마른 젊음들이 모여 작은 축제를 여는 열정도의 캐치프레이즈는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이다.  

열정도는 지하철 1호선 남영역, 6호선 효창공원역 사이에 있다. 4·6호선 삼각지역과도 가깝다. 높은 고층빌딩 사이 외딴섬처럼 남겨진 곳이지만, 젊은이들의 열정이 넘쳐나는 곳이기도 하다.
열정도는 지하철 1호선 남영역, 6호선 효창공원역 사이에 있다. 4·6호선 삼각지역과도 가깝다. 높은 고층빌딩 사이 외딴섬처럼 남겨진 곳이지만, 젊은이들의 열정이 넘쳐나는 곳이기도 하다.

여행작가 유성문은 길에서 길의 내력을 들춰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겨왔다. 그 내력과 사연은 먼빛이 되어 다시 그를 길로 내세운다. ‘길에서 길을 묻다’(경향신문), ‘사람의 길’(주간경향) 등 오랫동안 길과 사람 이야기를 써왔다. 문학관기행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를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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