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종로에서
모두 우산을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장맛비 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창에/ 신호등에 멈춰서는 시민들 우산 위에/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정태춘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 중에서
1992년 장마는 유난히도 짧았다. 7월 9일부터 23일까지 단 보름 만에 장마는 끝이 났다. 1993년 10월에 발표한 정태춘의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는 몇 가지 주요한 시의를 띠고 있었다. 음반 사전심의에 맞서 공개적으로 비합법적인 방법(사전심의 없이)으로 출반, 판매, 배포를 강행한 기념비적인 음반이었고, 그 결과는 1996년 위헌판결에 따라 사전심의제가 폐지되는 성과로 나타난다. 사실 이 음반에 수록된 곡들은 1990년 정태춘이 형식적인 사전심의를 거쳐 발표한 ‘아, 대한민국’에 비한다면 오히려 사전심의 따위는 필요 없을 만한 곡들이었다. 한편으로 1992년 여름은 그 해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3당 야합(‘아, 대한민국’의 1990년)’으로 민주화의 깃발이 참담히 꺾일 음울한 조짐을 보여주던 이른바 ‘환멸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5년 후 이 땅에는 미증유의 IMF환란이 찾아들었다.
그와 함께 ‘잃어버린…’인지 ‘되찾은…’인지 모를 10년에 또 10년, 그리고 2년이 더 지나고 2019년 여름, 장마는 다시 시작되었다. 장마가 시작되고, 기다리지 않아도 깃발군중은 서울역에서 광화문으로, 종로로 넘실거렸다. 하지만 태극기에 성조기에, ‘애국’인지 ‘공화’인지 넘실거리는 군중은 예전의 그 ‘깃발군중’은 아니었다. 잠시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니, 비에 젖은 비둘기들 힘없이 공중을 날아오른다. 그들이 낮은 자세를 취할 때면, 아스팔트 위에는 으레 음식물 찌꺼기가 버려져 있기 마련이었다. 그것들로 비둘기들은 한껏 비만해졌지만, 그 비만의 내면에는 끊임없는 공복이 가득했다. 종각 맞은편 옛 전옥서 터에 들어선 전봉준 동상만이 넘실거리는 소란을 지켜보며 어둑하게 앉아있었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랴.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가느니.
장마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반짝 해가 나자 탑골공원 일대는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온 노인들로 가득했다. 언제부터인가 탑골공원 일대는 ‘노인들의 세상’이 되었다. 탑골공원뿐만 아니라 종묘공원, 길 건너 국일관 일대까지 온통 노인전용구역이나 마찬가지다. 최근엔 탑골공원 북문에서부터 낙원상가까지 노인들을 위한 ‘락희거리’가 조성되고, 노익장의 상징이기도 한 국민MC 송해의 이름을 딴 ‘송해길’도 생겨났다. 노인들이 이곳으로 몰려드는 이유는 한결같다. 값이 싼 음식점과 이발소, 노인용품 전문점과 콜라텍에 무료급식소까지, 용돈이 궁한 노인들에겐 그나마 하루를 소일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곳에는 말동무도 있고 놀이상대도 있다. 때론 적대적이 될지라도 외로움보다 더 큰 적은 없다. 어쩌면 지금 거리를 떠도는 황망함마저도 그 싸움에서 비롯한 것인지도 모른다.
종로의 뒷골목들엔 생각보다 깊숙한 사연들이 웅숭그리고 있다. 사라진 옛 ‘종3’의 기억은 차치하고라도 피맛골이며, 우미관골목이며, 공평동 학원가 뒤편의 그 많던 독서실과 ‘은신’의 여관까지, 한 시대를 따라 흘러온 추억들이 곳곳에 배어있다. 역시 지금은 사라진 파고다극장은 또 어떤가. 1960년 개관한 파고다극장은 80년대 대한민국 메탈공연의 메카였고, 90년대 들어서는 게이문화의 온상이기도 했다. 더욱이 이 극장은 80년대가 끝나갈 무렵 한 시인의 죽음으로 기억에 남는 곳이 되었다. 기형도 시인.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빈집’) 같은 절창을 남긴 시인은 1989년 3월 7일 새벽 3시 50분경 심야프로 상영이 끝난 후 관객이 모두 빠져나간 객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가 왜 늦은 시간에 홀로 극장에 갔는지, 어쩌다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한 일간지 편집기자로 일하고 있었고, 서른둘의 나이였다.
탑골공원에서 길을 건너 종각 쪽으로 꺾이면 아연 분위기는 달라진다. 이른바 ‘젊음의 거리’다. 마치 탑골공원의 노후함에 반전이라도 꾀하듯 ‘젊음’을 앞세워보지만 내면을 살펴보면 기실 뭐 그리 크게 다를 것도 없다. 예전 학원가였던 거리에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업소들만 가득하고, 딱히 ‘젊음의 문화’라고 할 만한 것은 찾기 어렵다. 오가는 젊음들도 애시당초 젊음을 발산하려기보다는 그저 먹고 마시고 놀기 마땅한 장소만을 찾는 눈치다. 락희거리가 ‘추억을 파는 극장’, ‘어르신 뷰티살롱’, ‘치매특효약 카레라이스’ 등으로 덮여가는 것처럼 여기서 ‘젊음’은 단지 상술의 대상일 뿐이런가. 그래도 갈 데 없는, 갈 곳을 찾는 젊음들은 거리로 거리로 몰려든다. ‘젊음’과 ‘늙음’의 거리는 얼마쯤인가. 묻지 마라. 그저 흐르고 흘러, 흘러갈 뿐이니.
다시 간간히 비가 흩뿌리고, 이윽고 종로에도 밤이 찾아든다. 거리엔 하나둘 휘황한 불빛들이 켜지고 어둠속에서 또 다른 시간을 준비한다. 그 불빛 아래 전옥서 터 전봉준 동상을 타고 내려온 빗물과, 종각의 척화비를 적신 빗물과, 종로타워 뒤 하나투어 상공을 선회한 빗물과, 종묘공원 ‘박카스 아줌마’의 돗자리에 스며든 빗물과, 탑골공원 담장 기와 위에, 청계천 전태일 동상의 등줄기로, 종3의 낡은 골목길에, 대학로 피에로의 빨간 코끝에, 광화문 젖은 천막 아래, 먹자골목 포장마차 위로, 다시 ‘종로5가 서시오판(신동엽 ’종로5가‘)’을 타고 내린 빗물들 모두 모여 어디로 흘러갈 것인가. ‘가문 어느 집(강은교 ’우리가 물이 되어‘)’으로나 흘러가면 좋으련만, 흐르고 흘러 기어이 저문 바다에 닿고야 말 것인가.
비가 개이면/ 서쪽 하늘부터 구름이 벗어지고/ 파란 하늘이 열리면/ 저 남산타워쯤에선 뭐든 다 보일게야/ 저 구로공단과 봉천동 북편 산동네 길/ 아니, 삼각산과 그 아래 또 세종로 길도/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여행작가 유성문은 길에서 길의 내력을 들춰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겨왔다. 그 내력과 사연은 먼빛이 되어 다시 그를 길로 내세운다. ‘길에서 길을 묻다’(경향신문), ‘사람의 길’(주간경향) 등 오랫동안 길과 사람 이야기를 써왔다. 문학관기행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를 펴내기도 했다.
세월을 이길 자가 그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한 곳에서 40년 가까지 원형을 유지하며 장사하시는 분들이 있다. 말하여 서울유산에 등록된 건물과 가게이다. 몇 군데도 가 보았다. 그 분들이 주위의 개발로 발전할 때 멈춰선 기분이다. 문화재로 지정이 되어도정부의 지원이 아무 것도 없단다. 간판 하나 달아 주는 것이 전부란다.
최소한 세제혜택(세금면제)이라도 해 줘서 서울유산이 시대가 변하고 거리가 변하고 길이 변해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 우리의 추억을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유성이 작가의 다음 편이 기다려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