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아래 서촌

필운동의 홍건익 가옥은 서촌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옛집이다. 조선시대 왕족과 사대부 집권세력의 주 거주지였던 북촌과는 달리 서촌은 역관이나 의관 등 전문직인 중인들이 주로 모여 살던 곳이다. 1930년대 이 집을 지은 홍건익도 사대부가 아닌 상인으로 알려져 있다. 홍건익 이전 토지 소유자 중 한 명인 고영주는 역관이었다. 1914년 <매일신보>에는 ‘필운대에 사는 고영주 씨가 빈민을 구제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그는 위항문학(委巷文學, 18세기 이후 중인계급을 중심으로 발달한 문학)의 일파인 ‘육교시사(六橋詩社)’에 참여하기도 했다. 

‘서촌(西村)’이라는 명칭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역사적으로 조선시대 ‘서촌’이라 불린 곳은 서소문 일대여서 이곳을 ‘서촌’이라고 부를 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역사학자 및 전문가들을 중심으로 있어왔다. 이에 종로구 지명위원회는 2013년 이 지구의 공식 명칭을 '세종마을'로 의결했다. 그러나 2017년 한옥체험관을 '상촌재'라 명명하며 이 지구의 옛 이름이 '상촌(웃대)'이라고 밝혀 일관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 '웃대'는 청계천 상류 전체를 뜻하는 지명이어서 이곳만을 가리키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다. 

왼쪽/으리으리한 정통 한옥이 모여 있는 북촌과는 달리 서촌의 한옥들은 1910년대 이후 주택계획에 의해 대량으로 지어진 이른바 개량한옥이 대부분이다. 홍건익 가옥은 자연지형을 살려 건물을 앉힌 실용적 구조와 함께 서울에 남아있는 한옥 중 보기 드문 규모로 근대시기 한옥의 특징을 보여주는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서울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오른쪽/‘필운동’이란 지명의 유래가 되는 필운대(弼雲臺)는 조선시대 ‘필운대 꽃놀이’라 불릴 만치 장안의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던 경승이다. 지금은 배화여대 건물에 가린 채 조선 중기 문신 이항복이 새겨 넣은 ‘필운대’ 암벽글씨만이 남아 한 시대의 명성을 쓸쓸하게 전하고 있다.
왼쪽/으리으리한 정통 한옥이 모여 있는 북촌과는 달리 서촌의 한옥들은 1910년대 이후 주택계획에 의해 대량으로 지어진 이른바 개량한옥이 대부분이다. 홍건익 가옥은 자연지형을 살려 건물을 앉힌 실용적 구조와 함께 서울에 남아있는 한옥 중 보기 드문 규모로 근대시기 한옥의 특징을 보여주는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3년 서울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오른쪽/‘필운동’이란 지명의 유래가 되는 필운대(弼雲臺)는 조선시대 ‘필운대 꽃놀이’라 불릴 만치 장안의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던 경승이다. 지금은 배화여대 건물에 가린 채 조선 중기 문신 이항복이 새겨 넣은 ‘필운대’ 암벽글씨만이 남아 한 시대의 명성을 쓸쓸하게 전하고 있다.

어쨌든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서쪽의 사이의 청운효자동, 사직동 일대를 일컫는 서촌은 근래 북촌에 버금가는 전통마을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동안 청와대가 인접한 탓에 개발의 혜택을 보지 못하다가 1990년대 말 건축규제가 완화되면서 빌라가 많이 들어서기도 했지만, 최근 다시 한옥 보존의 필요성이 커짐에 따라 북촌이나 인사동과 같은 한옥보존지구로 지정되었다. 전통마을로서의 역사성에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 통인시장의 ‘도시락 카페’ 마켓 등이 유명세를 타면서 새로운 도시관광지로 떠오르고 있지만, 반면 과도한 상업화와 젠트리피케이션 등의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서촌에서 어지간히 알려진 집이면 주말이 아니더라도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유명한 ‘토속촌삼계탕’같은 경우는 뙤약볕 밑에 길게 늘어서서 순번을 기다리는 손님들을 위해 햇볕을 가릴 우산까지 준비해놓는다.
서촌에서 어지간히 알려진 집이면 주말이 아니더라도 줄을 서서 기다리는 일이 일상이 되었다. 유명한 ‘토속촌삼계탕’같은 경우는 뙤약볕 밑에 길게 늘어서서 순번을 기다리는 손님들을 위해 햇볕을 가릴 우산까지 준비해놓는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시대 위항문학의 중심이기도 했던 서촌에는 그 연유 때문인지 예로부터 많은 문인·예술가들이 거주해왔다. 조선시대에는 겸재 정선과 추사 김정희, 근대에는 화가 이중섭과 이상범, 시인 윤동주와 이상 등이 서촌 주민이었다. 박노수 화백이 살던 집은 2013년 종로구립 박노수미술관으로 재탄생하기도 했다. 특히 ‘이상의 집’은 2009년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처음 보존재산으로 매입해 문화공간으로 개방한 곳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비록 원래 이상이 살던 집은 헐리고 필지 일부에 새로 지은 집으로 밝혀져 등록문화재로 지정했다가 해제하는 소동을 빚기는 했지만.

시인 이상이 오랫동안 살았던 집은 1933년 몇 개의 필지로 분할되어 팔린 후 소규모로 새로 지어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지금의 ‘이상의 집’이다.
시인 이상이 오랫동안 살았던 집은 1933년 몇 개의 필지로 분할되어 팔린 후 소규모로 새로 지어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지금의 ‘이상의 집’이다.

‘이상의 집’을 지나 누각길을 따라 걷다보면 옥인부동산 안쪽 골목에서 대오서점을 만난다. 1951년에 개점한 헌책방으로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으로 알려져 있다. 서점의 이름은 주인장 조대식·권오남 부부의 이름에서 한 자씩 따온 것이라고 한다. 부부가 평생 이 작은 책방을 운영하면서 자식교육을 다 시켰다고 하니 책방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 아이유의 ‘꽃갈피’ 앨범 자켓 촬영지, 2013년 TV드라마 ‘상어’의 촬영지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가게를 이어받은 다섯째딸에 의해 헌책방의 외관은 그대로 유지한 채 리모델링하여 북카페로 운영되고 있다.

낡은 기와지붕 아래 마치 시간이 멈춰있는 듯한 대오서점은 서촌에서 가장 유명한 포토플레이스이기도 하다.
낡은 기와지붕 아래 마치 시간이 멈춰있는 듯한 대오서점은 서촌에서 가장 유명한 포토플레이스이기도 하다.

인왕산 자락의 옛 수성동계곡을 향해 누상동 길을 걸으면 ‘윤동주 하숙집터’가 나온다. 1941년 당시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윤동주는 자신이 존경하던 소설가 김송의 집이던 이곳에서 하숙생활을 했다. 본래의 집은 헐리고 현재는 2층 다세대주택이 들어서 있다. 안내판에는 그의 대표작 ‘별 헤는 밤’, ‘자화상’, ‘또 다른 고향’ 등이 이곳에서 쓰인 것으로 소개되어 있지만, ‘자화상’은 1939년에, ‘별 헤는 밤’은 김송의 집을 떠난 후인 1941년 11월에 쓰여졌다. 시기적으로 ‘또 다른 고향’만이 이곳에서 쓰여진 시이지만, 장소의 의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주요 작품이 이곳에서 쓰인 것처럼 적어 넣은 것으로 여겨진다.

‘윤동주 하숙집터’. 아쉽게도 현재 집의 원형은 남아있지 않지만, 청운동 윤동주문학관에서 시인이 남긴 자취를 만나볼 수 있다.
‘윤동주 하숙집터’. 아쉽게도 현재 집의 원형은 남아있지 않지만, 청운동 윤동주문학관에서 시인이 남긴 자취를 만나볼 수 있다.

‘윤동주 하숙집터’에서 100미터쯤 더 올라가면 수성동계곡이다. 수성동계곡은 인왕산 동쪽 자락의 계곡으로 옛적 서촌을 관통하던 옥류동천의 최상류지역에 해당한다. ‘수성(水聲)’은 ‘물소리가 맑다’는 의미를 지닌다. 수성동계곡은 선비들의 근교 휴양지로, 또 역사지리서인 <동국여지비고>에 소개되는 등 명승지로 유명했는데 정선의 산수화 ‘수성동’에 등장하면서 더더욱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1971년 옥인시범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계곡이 크게 훼손되었지만, 2011년 아파트를 철거하면서 복원을 시작했고, 지금은 예전 자연계곡의 모습을 많이 되찾았다. 특히 정선의 그림 속에도 등장하는 돌다리(기린교)가 아파트 건립과정에서 없어졌다가 2009년 철거를 앞두고 아파트 옆 계곡에서 형태가 비교적 온전한 채로 발견되기도 했다.

수성동계곡은 2012년 난개발의 상징인 옥인시범아파트를 철거하고 이곳을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하면서 제법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계곡 사이에 놓인 돌다리가 정선의 그림 속에도 등장하는 기린교다.
수성동계곡은 2012년 난개발의 상징인 옥인시범아파트를 철거하고 이곳을 문화재보호구역으로 지정하면서 제법 옛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다. 계곡 사이에 놓인 돌다리가 정선의 그림 속에도 등장하는 기린교다.

서촌의 맛집골목으로 유명한 통인시장은 1941년 일제에 의해 효자동 일대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처음 개설된 공설시장이었다. 당연히 ‘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 생활편의를 제공하려는 목적이 우선적’이었다. 개설 당시에는 지금의 통인시장 입구 북쪽 효자아파트 자리에 위치해 있었지만, 단층에 낡고 비좁아 1960년 후반 5층 건물로 재건축되었다. 현재 통인시장에서는 시장상인들이 직접 만들어 판매하는 정성이 가득담긴 여러 가지 반찬으로 든든한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도시락카페 통(通)’을 운영하면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시장에서 개당 500원인 엽전을 구입하고, 이때 함께 주는 빈 도시락을 들고 시장 안을 돌아다니며 가맹점에서 엽전을 내고 반찬을 산다. 시장 전체가 거대한 ‘한식 뷔페’인 셈이다. 

통인시장의 명물인 ‘원조 할머니 기름떡볶이’는 6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솥뚜껑에 볶아내는 떡볶이로, 고추장에 볶아내는 매콤한 맛과 간장에 볶아내는 짭조름한 맛 2가지 떡볶이를 맛볼 수 있다. 평일에도 어르신에서부터 아이들까지 단골들로 줄을 잇는 ‘할머니 기름떡볶이’는 38번째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통인시장의 명물인 ‘원조 할머니 기름떡볶이’는 6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솥뚜껑에 볶아내는 떡볶이로, 고추장에 볶아내는 매콤한 맛과 간장에 볶아내는 짭조름한 맛 2가지 떡볶이를 맛볼 수 있다. 평일에도 어르신에서부터 아이들까지 단골들로 줄을 잇는 ‘할머니 기름떡볶이’는 38번째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서촌기행의 마무리는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 맞은편의 보안여관이다. 1930년대 문을 연 이 여관은 오랜 세월 수많은 ‘서울나그네’들을 품어주었다. 특히 보안여관은 우리 문학사에 깊은 인연을 대고 있다. 1936년 22세의 서정주가 이곳에 짐을 풀고 투숙한다. 그리고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등과 문학동인지 <시인부락>을 창간한다. 비록 통권 2호로 끝났지만, <시인부락>은 이른바 ‘생명파’의 구심점이 된 동인지로 평가받고 있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보안여관은 해방 후 지방의 문학·예술인들이 서울에 올라와 장기 투숙하는 곳으로 자주 이용되었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청와대 직원들이 주요 고객이었고, 이 때문에 ‘청와대 기숙사’로 불리기도 했다. 보안여관은 시대의 흐름에 밀려 2004년 문을 닫았고, 현재는 ‘통의동 보안여관’ 간판을 그대로 단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서촌 80년 근·현대사를 대변하는 보안여관은 현재 북클럽(BOAN BOOKS) 등으로 쓰이는 옆 건물과 함께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서촌 80년 근·현대사를 대변하는 보안여관은 현재 북클럽(BOAN BOOKS) 등으로 쓰이는 옆 건물과 함께 복합문화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샛길로 : 사직동, 그 가게
사직동 배화여대 인근에 위치한 ‘사직동, 그 가게’는 티베트 난민 여성들의 자립을 돕기 위한 자선단체 ‘록빠(Rogpa)’에서 운영하는 여성작업장 및 교육센터다. 이곳에서 만들어진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샵과 티베트 전통찻집인 ‘짜이집’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여기서 발생하는 수익금은 기술을 필요로 하는 티베트 난민 여성들에게 기본 2년 동안의 기술교육비와 생활지원금 등으로 쓰이고 있다. 이곳에서는 ‘록빠’가 인도에서 운영하고 있는 탁아소와 어린이도서관 등에 대한 후원금도 접수한다. www.tibetrogpa.org.
‘세계의 지붕’이라 불리는 티베트는 인도와 네팔 북쪽 히말라야 산맥 너머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큰 고원이다. 1950년 중국 침략 이후 중국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으며, 중국이 티베트를 침략하는 동안 6000개 이상의 절과 사원이 파괴되고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현재도 티베트 문화에 대한 억압과 파괴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1959년 달라이 라마의 망명 이후 인도 북부 다람살라에 세워진 티베트 망명정부는 나라를 되찾기 위한 비폭력 평화투쟁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현재 15만명 이상의 티베트 난민들이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인도에만 10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티베트 난민들에게 경제적 어려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특히 여성들은 가사와 육아에 관한 부담까지 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풍부하고 독특한 전통을 지켜왔으며, 그 안에서 평화적인 삶을 이루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사직동, 그 가게’ 찻집 앞에 붙어있는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진다면 걱정이 없겠네’라는 티베트 속담이 새록하게 다가온다.
현재 15만명 이상의 티베트 난민들이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고 있으며, 인도에만 10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티베트 난민들에게 경제적 어려움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특히 여성들은 가사와 육아에 관한 부담까지 지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의 풍부하고 독특한 전통을 지켜왔으며, 그 안에서 평화적인 삶을 이루려는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사직동, 그 가게’ 찻집 앞에 붙어있는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진다면 걱정이 없겠네’라는 티베트 속담이 새록하게 다가온다.

여행작가 유성문은 길에서 길의 내력을 들춰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겨왔다. 그 내력과 사연은 먼빛이 되어 다시 그를 길로 내세운다. ‘길에서 길을 묻다’(경향신문), ‘사람의 길’(주간경향) 등 오랫동안 길과 사람 이야기를 써왔다. 문학관기행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를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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