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숲과 성수동

나는 뚝섬에 관한 별다른 추억이 없다. 그런데도 ‘뚝섬’하면 ‘추억’이란 단어부터 떠오른다. 아마도 오래 전 어느 책에선가 본 1960~70년대의 뚝섬 풍경 사진 두어 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 한 장은 경기가 한창인 뚝섬경마장 사진이고, 또 한 장의 사진은 플라타너스와 버드나무가 숲을 이룬 뚝섬유원지의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둘 다 그 유래가 깊은, 하지만 지금은 사라진 풍경들이다. 조선시대 말 목장의 역사를 이어가던 뚝섬경마장은 1989년 과천으로 옮겨갔고, 역시 조선시대 뗏목나루터에서 비롯하여 광나루와 함께 오래도록 서울시민의 강변놀이터였던 옛 뚝섬유원지는 한강 개발과 함께 추억으로만 남았다. 때로는 사진 한 장이 사실보다 더 진한 추억이 된다. 그 추억을 따라 ‘성 밖 동쪽 들’로 흘러가보자.

뚝섬은 섬이 아닌 섬이다. 중랑천과 청계천이 합류해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면서 형성된 퇴적평야로, 3개의 하천이 가로지르며 3면을 둘러싸다보니 마치 섬처럼 되었다. 조선시대 이 지역을 도성 동쪽의 들이라는 뜻에서 ‘동교(東郊)’, 또는 태종과 반목하던 태조가 분노의 화살을 쏜 곳이라 하여 ‘살곶이벌’이라고 불렀다. 동교는 전국에서 사육한 4만~5만 마리의 말 중 ‘서울로 보낸’ 준마만을 키우던 국립목장이자 왕의 사냥터, 군사훈련장이기도 했다. 군대를 사열하거나 출병할 때 왕을 상징하는 깃발인 둑기(纛旗)를 세우고 둑제(纛祭)를 지낸 곳이라 하여 ‘둑섬’, ‘둑도’라 불리기도 하다가 이후 '뚝섬'으로 소리가 바뀌었다. 뚝섬은 1950년 성동구로 편입되면서 ‘성수동(聖水洞)’으로 이름을 바꿨다. ‘성덕정(聖德亭)’이라는 왕이 머물던 정자에서 ‘성’자를, 우리나라 최초의 상수시설인 ‘뚝도수원지’에서 ‘수’자를 딴 합성지명이다. 

뚝섬선착장에서 바라본 잠실. 뚝섬유원지 자리에 있던 뚝섬나루는 중부내륙과 서울을 잇는 뱃길의 요충이었다. 양평, 여주, 충주, 춘천에서 뗏목이 되어 한강을 타고 떠내려온 재목과, 배로 실려온 농산물, 그리고 인천과 강화에서 거슬러 올라온 해산물이 이곳에 부려졌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다녀, 2010년 입적한 법정스님은 생전에 대장경 번역작업을 위해 강남 봉은사로 건너다니던 1972년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승용차뿐 아니라 소가 끄는 수레며 분뇨를 실은 트럭이며, 그 바퀴 아래 신사와 숙녀들도 함께 태워준다.”
뚝섬선착장에서 바라본 잠실. 뚝섬유원지 자리에 있던 뚝섬나루는 중부내륙과 서울을 잇는 뱃길의 요충이었다. 양평, 여주, 충주, 춘천에서 뗏목이 되어 한강을 타고 떠내려온 재목과, 배로 실려온 농산물, 그리고 인천과 강화에서 거슬러 올라온 해산물이 이곳에 부려졌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강을 건너는 나룻배가 다녀, 2010년 입적한 법정스님은 생전에 대장경 번역작업을 위해 강남 봉은사로 건너다니던 1972년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승용차뿐 아니라 소가 끄는 수레며 분뇨를 실은 트럭이며, 그 바퀴 아래 신사와 숙녀들도 함께 태워준다.”

비록 지명은 바뀌었지만 뚝섬의 본디 정체성인 목장과 수원지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했다. 1954년 신설동에 있던 경마장이 뚝섬으로 옮겨온 것은 ‘말 목장’이라는 장소의 관성이 살아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나마 1930년대 놓인 ‘기동차’는 1960년대까지 동대문-뚝섬 구간을 달리면서 주민들의 발이자 이곳에서 생산된 채소들의 수송수단 구실을 했다. 그런데 이 기동차의 진가는 엉뚱하게도 뚝섬유원지용 피서열차로 발휘된다. 1940년대부터 조성된 뚝섬유원지가 강수욕과 뱃놀이 터로 서서히 각광을 받기 시작하면서 1960~70년대 여름철이면 하루 10만 명, 절정 때는 20만 명의 행락객이 몰려들었다. 70여 척의 놀잇배가 뚝섬유원지 수상을 쉴 새 없이 오갔고, 1986년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사라졌지만 옛 뚝도공립보통학교(현 경동초등학교) 자리에 뚝섬유원지 여름경찰서가 있을 정도였다. 

왼쪽/뚝섬유원지는 1980년대 한강종합개발사업과 함께 뚝섬한강공원으로 편입되었다. 2010년 개장한 뚝섬전망문화콤플렉스 ‘자벌레’는 뚝섬한강공원의 입구 역할과 동시에 문화예술공간을 겸하고 있는 건물이다. 지하철 7호선 뚝섬유원지역 3번 출구 옆 통로와 연결되어 있다. 자벌레를 닮은 긴 통로형 건물로, J모양의 건물 구조의 특이성 때문에 건물 구분을 머리, 몸통, 꼬리로 해놓고, 다시 몸통을 1~3층으로 구분해놓았다. 오른쪽/자벌레 2층 도서관 공간인 ‘책 읽는 벌레’에 한여름을 무색케 하는 독서열기가 빼곡하다. 하긴 독서만한 피서법도 없으리니.
왼쪽/뚝섬유원지는 1980년대 한강종합개발사업과 함께 뚝섬한강공원으로 편입되었다. 2010년 개장한 뚝섬전망문화콤플렉스 ‘자벌레’는 뚝섬한강공원의 입구 역할과 동시에 문화예술공간을 겸하고 있는 건물이다. 지하철 7호선 뚝섬유원지역 3번 출구 옆 통로와 연결되어 있다. 자벌레를 닮은 긴 통로형 건물로, J모양의 건물 구조의 특이성 때문에 건물 구분을 머리, 몸통, 꼬리로 해놓고, 다시 몸통을 1~3층으로 구분해놓았다. 오른쪽/자벌레 2층 도서관 공간인 ‘책 읽는 벌레’에 한여름을 무색케 하는 독서열기가 빼곡하다. 하긴 독서만한 피서법도 없으리니.

뚝섬 일대는 1949년 서울로 편입되기 이전에는 한강의 하항(河港)과 근교농업지로 유명했으나, 1940년대 후반부터 도시화가 시작되었다. 경제개발이 본격화된 1960년대 초부터 무, 배추, 토마토 등 채소 재배지에 공장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1970년대 들어 도시형 전통산업이라고 할 수 있는 수제화, 인쇄, 자동차정비업 중심으로 지역경제가 재편되었다. 구로공단처럼 국가 주도 산업단지가 아니라 도심의 제조업체들이 교통이 편리하고 땅값이 싼 성수동으로 옮겨온 것이다. 1971년 당시 성수공단에 입지한 제조업체는 모두 671개로, 서울 전체의 20%를 넘을 정도였다. 지금은 비록 무허가 공해업소에서 쏟아내는 폐수로 인한 수질악화 등 공해문제가 발목을 잡으면서 현저히 쇠퇴하기는 했지만, 아직도 ‘수제화거리’를 비롯한 소규모 도시형 공장들이 곳곳에 남아 명맥을 잇고 있다. 

성수동 일대에는 1970~80년대 붉은 벽돌로 된 공장과 창고가 많이 지어졌고, 이와 함께 역시 붉은 벽돌로 된 소규모 주택들이 골목을 이루며 들어서기도 했다. 서울시에서는 현재 ‘성수동 붉은 벽돌 마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옥’하면 북촌이 떠오르듯 ‘붉은 벽돌’하면 ‘성수동’을 떠올릴 수 있도록 지역 건축자산을 보전하고, 마을을 명소화하기 위한 저층주거지 도시재생사업이다.
성수동 일대에는 1970~80년대 붉은 벽돌로 된 공장과 창고가 많이 지어졌고, 이와 함께 역시 붉은 벽돌로 된 소규모 주택들이 골목을 이루며 들어서기도 했다. 서울시에서는 현재 ‘성수동 붉은 벽돌 마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한옥’하면 북촌이 떠오르듯 ‘붉은 벽돌’하면 ‘성수동’을 떠올릴 수 있도록 지역 건축자산을 보전하고, 마을을 명소화하기 위한 저층주거지 도시재생사업이다.
성수동 거리에는 새 건물을 짓는 공사장들이 널려 있다. 낡은 공장, 건물들이 있던 자리가 속속 새 건물들로 다시 채워지는 중이다. 지하철 분당선 서울숲역 인근에 위치한 ‘언더스탠드에비뉴’는 이러한 도시의 변화과정에서 생겨난 건축물이다. 지상 1~3층 높이의 컨테이너 116개로 구성된 언더스탠드에비뉴는 2016년 서울숲 주변 주상복합단지 공사장 두 곳 사이의 길이 120여m, 폭 30여m 공간에 지어졌다. 당시 공사가 예정된 상업지역 사이 공터를 청년층의 창업지원, 취약계층을 위한 자립공간으로 활용하자는 민간단체의 아이디어와 기업의 사회공헌기금 기부, 성동구청의 지원이 결실을 이뤄낸 모범사례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 청년과 실버세대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플랫폼으로 운영되며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언더스탠드에비뉴는 성수동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나 다름없다.
성수동 거리에는 새 건물을 짓는 공사장들이 널려 있다. 낡은 공장, 건물들이 있던 자리가 속속 새 건물들로 다시 채워지는 중이다. 지하철 분당선 서울숲역 인근에 위치한 ‘언더스탠드에비뉴’는 이러한 도시의 변화과정에서 생겨난 건축물이다. 지상 1~3층 높이의 컨테이너 116개로 구성된 언더스탠드에비뉴는 2016년 서울숲 주변 주상복합단지 공사장 두 곳 사이의 길이 120여m, 폭 30여m 공간에 지어졌다. 당시 공사가 예정된 상업지역 사이 공터를 청년층의 창업지원, 취약계층을 위한 자립공간으로 활용하자는 민간단체의 아이디어와 기업의 사회공헌기금 기부, 성동구청의 지원이 결실을 이뤄낸 모범사례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 청년과 실버세대의 일자리 창출을 위한 플랫폼으로 운영되며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는 언더스탠드에비뉴는 성수동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나 다름없다.

성수동은 명실상부 우리나라 수제화의 메카이다. 성수동은 어떻게 수제화의 메카가 되었을까. 예로부터 성수동과 화양동 일대에는 봉제공장이 많았다. 자연스레 피혁·의류, 가방·신발 공장 등이 따라 들어왔다. 봉제산업이 피혁산업과 제화산업으로 연쇄효과를 낳은 셈이다. 본래 서울의 수제화는 염천교와 명동에서 ‘살롱화’라는 이름으로 발달했다. 1950년대부터 신발공장이 들어선 염천교는 말할 것도 없고, 1970년대 후반 명동에만 100개가 넘는 수제화 업체가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쇠퇴와 함께 성수동이 서서히 수제화의 메카로 자리 잡았다. 기성화시대로 접어들면서 국내 양대 제조업체인 금강제화와 에스콰이어가 금호동과 성수동 시대를 마감하고 서울을 떠났지만, 남은 하청업체들이 1990년대 들어 성수동으로 속속 모여든 게 본격적인 성수동 수제화거리의 시작이다.

1990년대 이후 성수동은 명실공이 우리나라 구두제조의 중심지가 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구두제작, 구두 부분품 및 재단제품 제조업체의 절반 이상이 성수동 일대에 소재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는 구두뿐 아니라 다양한 패션제품으로 폭이 넓어졌다. 2013년 통계에 의하면 성동구의 섬유 및 의류 제조업체는 380개, 구두제조 관련업체 및 종사자는 650개에 6000여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1990년대 이후 성수동은 명실공이 우리나라 구두제조의 중심지가 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구두제작, 구두 부분품 및 재단제품 제조업체의 절반 이상이 성수동 일대에 소재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는 구두뿐 아니라 다양한 패션제품으로 폭이 넓어졌다. 2013년 통계에 의하면 성동구의 섬유 및 의류 제조업체는 380개, 구두제조 관련업체 및 종사자는 650개에 6000여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성동구에서는 2017년 지하철 2호선 뚝섬역 4번 출구 가까이에 ‘성수수제화 희망플랫폼’을 개관했다. 1층 전시장에는 문재인 대통령 내외 구두 및 수제화 장인과 신진 디자이너의 구두 작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2층 체험공방에는 수제화 장인의 제작과정을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일대에는 수제화 장인들이 운영하는 매장도 문을 열고 있다.
성동구에서는 2017년 지하철 2호선 뚝섬역 4번 출구 가까이에 ‘성수수제화 희망플랫폼’을 개관했다. 1층 전시장에는 문재인 대통령 내외 구두 및 수제화 장인과 신진 디자이너의 구두 작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2층 체험공방에는 수제화 장인의 제작과정을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되어 있다. 일대에는 수제화 장인들이 운영하는 매장도 문을 열고 있다.

뚝섬경마장은 서울올림픽을 치른 후인 1989년 과천으로 옮겨가면서 거대한 ‘허파’ 하나를 남겼다. 서울숲은 뚝섬경마장, 그리고 체육공원과 골프장 등이 있던 부지를 주거업무지역으로 개발하려던 처음 계획을 바꿔 뉴욕의 센트럴파크나 런던의 하이드파크 등을 본 딴 도심 속 녹지공원으로 조성되었다. 약 35만 평의 부지에 2352억 원의 사업비를 들여 테마공원 다섯 곳과 기타 시설들을 만들고 2005년 개장했다. 현재 (재)서울그린트러스트의 서울숲 운영조직인 ‘서울숲컨서번시’에서 관리 및 운영을 맡고 있다. 원래 관리감독 행정기관은 서울시청이었으나, 2016년 서울그린트러스트에 민간위탁되었다. 서울그린트러스트는 시민캠페인, 모금 등을 통해 서울숲 조성부터 함께해온 비영리단체로, ‘서울숲사랑모임’이라는 이름으로 11년 동안 서울숲 내에서 숲체험과 생태 프로그램 등을 기획 운영해왔으니 전혀 관련이 없는 곳이 위탁을 맡은 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대한민국 공원 민간위탁 최초의 사례이다.

서울숲 입구의 ‘군마상’은 과거 이곳이 경마장이 있던 곳이었음을 알려준다. 초기에는 공원 내에 승마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성수동 이마트 인근의 서울경찰기마대 역시 뚝섬경마장의 내력과 결코 무관치 않아 보인다.
서울숲 입구의 ‘군마상’은 과거 이곳이 경마장이 있던 곳이었음을 알려준다. 초기에는 공원 내에 승마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성수동 이마트 인근의 서울경찰기마대 역시 뚝섬경마장의 내력과 결코 무관치 않아 보인다.

서울숲은 원래 경마장, 체육공원 등이던 시설을 일부러 완전히 철거하지 않고 콘크리트 골격 일부를 남겨서 공원으로 리모델링했는데, 외려 ‘도시 속의 녹지’라는 컨셉에 잘 어울린다는 평가다. 화장실 등의 건물도 노출 콘크리트 위주로 디자인되었는데 분위기가 그다지 나쁘지 않은 편이다. 넓은 잔디밭과 어린이 놀이시설이 있어 가족단위 방문객이 많으며, 산책로가 잘 만들어져 있어 연인들도 많이 찾는다. 서울시내 여느 유명 공원과 마찬가지로 웨딩이나 코스프레 촬영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또 자전거나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도 많은데, 워낙 넓은 공원을 돌기에 유용할지는 모르지만 정작 숲을 조망하기에 좋은 보행가교 등에서는 자전거를 끌거나 신발을 벗어야 하는 단점이 있다. 몇몇 출입구를 통해 한강공원 자전거도로와 이어져 숲과 강변을 넘나드는 라이딩을 즐길 수도 있다. 

서울숲의 최대 미덕은 도심 속의 숲이란 점이다. 제대로 된 녹지공간이 턱없이 부족한 서울 동부지역에서 서울숲은 ‘도시의 허파’나 다름없다. 서울숲에서 ‘숲은 숨이 되고, 숨은 숲이 된다’(김훈 <자전거 여행>).
서울숲의 최대 미덕은 도심 속의 숲이란 점이다. 제대로 된 녹지공간이 턱없이 부족한 서울 동부지역에서 서울숲은 ‘도시의 허파’나 다름없다. 서울숲에서 ‘숲은 숨이 되고, 숨은 숲이 된다’(김훈 <자전거 여행>).

√ ‘문화로 즐기는 한강피크닉’을 주제로 시민, 관광객 누구나 가까운 곳에서 편하게 소풍가듯 피서를 즐길 수 있는 ‘2019 한강몽땅 여름축제’가 7월 19일부터 8월 18일까지 한 달 동안 11개 한강공원에서 일제히 열린다. 뚝섬한강공원에서는 패들보드‧카누‧카약 등 다양한 수상레저 기구를 체험하는 ‘한강수상놀이터(7.26~8.18, 월요일 휴무, 수상훈련장)’, 인형극·풀피리공연·그림자예술극 등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한강별빛소극장(8.2~10, 매주 금‧토, 자벌레 옆 잔디미당)’이 열린다. 또 ‘환경을 위한 3종 패키지 프로그램’이 올해 새롭게 선보인다. ‘3종 패키지 프로그램’은 가정에서 갖고 온 쓰레기나 한강에서 주운 쓰레기로 만든 미니 자동차로 경주를 펼치는 ‘서울자원레이스(7.27~28, 자벌레 하부)’, 흔하게 버려지는 플라스틱과 페트병을 활용해 뗏목을 만드는 ‘리사이클 뗏목 한강 건너기(8.10~11, 음악분수 일대 및 수상)’, 빨대를 잘라 붙여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Represh : 예술로 변형 가능한 물질(8.3, 자벌레 옆 잔디마당)’ 등이다.

-샛길로 : 그 성수대교

"그렇게 걱정들 했는데도, 기어이 오늘 성수대교 붕괴참사는 예고된 인재(人災)였습니다." -사고 당일 MBC 뉴스데스크 엄기영 앵커의 오프닝 멘트 중

‘부실공사 추방 원년의 해’ -건설부에서 지정한 1994년 슬로건

1994년 10월 21일,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잇는 성수대교가 일부 구간이 붕괴되면서 32명의 귀중한 생명을 앗아갔다. 그리고 국민들의 가슴은 또 한 번 무너져 내렸다. 성수대교 붕괴사고는 1970년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그리고 성수대교 붕괴 불과 1년 후에 일어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와 함께 안전불감증과 부실관행이 빚어낸 대형 참사로, 국민들의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화가 꿈꿨던 고(故) 이연수 양(사고 당시 17세) 
연수 양은 대기업 임원인 아버지를 둔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다. 사고 3년 전 울산에서 압구정동으로 이사를 왔지만, 당시 강남 8학군 고등학교의 정원 초과로 인해 할 수 없이 한강 건너 무학여고에 진학을 하게 된다. 화가를 꿈꿨던 연수 양은 학교 축제에 출전할 미술작품을 내느라 사고 당일 새벽 2시에 잠이 들었고, 집에서 평소보다 10분 늦게 나간 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성수대교에서 생을 마감했다. 연수양의 가방 속에서는 '아빠, 사랑해요!'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가 발견되어 당시 많은 사람들을 눈물짓게 만들었다. 연수 양은 현재 1996년 사망한 아버지와 나란히 용인 천주교묘지에 잠들어 있다. 

⚫성실했던 버스 운전기사 고(故) 유성열 씨(사고 당시 46세) 
성수대교 사고 버스의 운전기사였던 유성열 씨는 평소 말수는 적었지만, 동료들과 잘 어울리는 아주 성실한 사람이었다. 두 딸과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부인을 둔 그는 1992년까지는 관광버스를 운전했지만 그 후 시내버스 회사로 이직, 16번 버스의 운전대를 잡다가 결국 불운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당시 사고 버스의 바로 뒷 차의 운전자였던 최성태 씨는 사고 당일 버스 안에서 동료의 죽음을 듣고 펑펑 울었고, 지금도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고. 

⚫아픈 부모님 돕던 고(故) 배지현 양(사고 당시 16세) 
지현이는 부모님이 가게에서 돌아오는 오후 11시까지 매일같이 기다렸다 저녁식사를 차려드리고 밤늦게 잠이 들곤 해 학교에서는 '또자'가 별명인 잠보였다. 만성 신부전증을 앓는 어머니와 십이지장 출혈로 수술을 한 아버지를 대신해 소녀가장 역할을 하느라 늘 수면부족에 시달리다 죽어서야 비로소 편히 쉴 수 있게 된 그녀에게 친구들은 눈물의 편지를 썼다. 
"당장은 너를 볼 수 없겠지만 언젠가는 널 꼭 만날 수 있을 거라 믿는다." 
"넌 평소에 잠이 많았잖아. 맨날 책상에서 불편하게 눕지 않고 이제는 편히 오래 잠드려무나." 

⚫정 많았던 필리핀인 고(故) 아델 아이다(사고 당시 40세) 
필리핀인 아델 아이다는 1990년 아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한국에 왔다. 동대문구 장안동의 대동실업에서 미싱 시다로 일했던 그녀는 아침 출근길 버스 안에서 변을 당했다. 동료 박미나 씨는 그녀가 정이 많아 누가 아프기라도 하면 밤새 병간호를 해주던 기숙사의 큰언니였다고 회고한다. 한국에서 돈을 많이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그녀는 결국 싸늘한 시신으로 오동나무 관에 실려 대한항공 비행기 편으로 필리핀 가족에게 인도되었다. 

아직도 세상을 보이는 대로 믿고 편안히 잠드는가
그래도 지금이 지난 시절보다 나아졌다고 믿는가
무너진 백화점 끊겨진 다리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순 없다 우린 모두 공범일 뿐
-N.EX.T 3집 앨범 <The Return of N.EX.T Part 2 : World> ‘우리가 만든 세상을 보라’ 중에서

성수대교는 서울의 한강을 가로지르는 11번째 교량으로서 1979년 준공된 국내 최초의 게르버 트러스(gerber truss) 형식으로, 기능성 뿐 아니라 미관을 고려한 교량으로 평가되었다. 1994년에 교량이 붕괴되어 1997년에 다시 완공하여 재개통했다. 성수대교가 개통됨에 따라 이미 교통량이 포화상태에 있던 영동대교 및 한남대교의 교통량이 성수대교로 분산되었으며, 왕십리 일대의 서울 동부와 한강 이남의 신시가지인 영동지구를 연결해 강남지역의 균형 있는 발전을 촉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성수대교는 서울의 한강을 가로지르는 11번째 교량으로서 1979년 준공된 국내 최초의 게르버 트러스(gerber truss) 형식으로, 기능성 뿐 아니라 미관을 고려한 교량으로 평가되었다. 1994년에 교량이 붕괴되어 1997년에 다시 완공하여 재개통했다. 성수대교가 개통됨에 따라 이미 교통량이 포화상태에 있던 영동대교 및 한남대교의 교통량이 성수대교로 분산되었으며, 왕십리 일대의 서울 동부와 한강 이남의 신시가지인 영동지구를 연결해 강남지역의 균형 있는 발전을 촉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여행작가 유성문은 길에서 길의 내력을 들춰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겨왔다. 그 내력과 사연은 먼빛이 되어 다시 그를 길로 내세운다. ‘길에서 길을 묻다’(경향신문), ‘사람의 길’(주간경향) 등 오랫동안 길과 사람 이야기를 써왔다. 문학관기행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를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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