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래마을과 방배동 카페골목
옮겨다 심은 종려나무 밑에/ 비뚜로 선 장명등/ 카페 프란스에 가자. (…) 밤비는 뱀눈처럼 가는데/ 페이브먼트에 흐느끼는 불빛/ 카페 프란스에 가자. (…) 나는 자작(子爵)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란다./ 남달리 손이 희어서 슬프구나!//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단다./ 대리석 테이블에 닿는 내 뺨이 슬프구나!// 오오, 이국종(異國種) 강아지야/ 내 발을 빨아다오./ 내 발을 빨아다오. -정지용 ‘카페 프란스’ 중에서
프랑스어로 ‘카페(cafe)’는 ‘커피’의 뜻을 겸한다. 아프리카가 원산지인 커피는 17세기 무렵 유럽에 전래된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1686년 시칠리아 사람 프로코프에 의해 파리에서 처음 카페가 문을 연 이래 카페는 문화를 넘어 역사가 된다. 1789년 진보적 지식인 카미유 데몰랭이 ‘카페 푸아’ 탁자에 올라 ‘카페를 벗어나 혁명을!’을 외친 이틀 뒤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된 바스티유감옥 습격사건이 일어난다. ‘프랑스혁명은 카페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비롯한 까닭이다. 혁명 이후 파리의 카페는 정치색을 벗고 작가와 화가 등 예술가들의 아지트가 되었고, 20세기 들어서는 장 폴 사르트르와 알베르 카뮈 등에 의해 ‘실존’의 경지로까지 나아간다. 생제르맹 거리의 ‘카페 마고’는 카뮈가 ‘이방인’을 쓴 곳이며, ‘카페 플로르’는 사르트르가 ‘집으로 삼았다’고 회고한 곳이다.
1980년대부터 ‘카페골목’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지금은 그 골목이 흔하디흔한 ‘먹자골목’이 되어버린 방배동을 찾아가는 길을 서래마을에서 시작하는 것은 그나마 조금은 위로가 된다. 어쩌다 ‘프랑스인 마을’이 되어버린 서래마을에서 카페의 기원을 추억할 수 있으니. 방배동과 반포동에 걸쳐있으면서 20년 전만 해도 외부사람들의 왕래가 별로 없는 그저 한적한 동네였던 서래마을이 프랑스인들이 몰려 사는 고급주택가로 바뀌기 시작한 것은 우리나라가 고속철도사업을 추진하면서 1998년 시제차량으로 프랑스 알스톰사의 테제베를 도입할 때부터. 당시 프랑스에서 기술지원을 위해 파견한 인원들이 이곳에 장기간 머물면서 덩달아 다른 프랑스인들도 속속 이주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KTX가 만들어진 이후로는 수가 좀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한국에 사는 프랑스인 중 절반 정도가 서래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래마을에 사는 프랑스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몽마르뜨공원은 서래마을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원래 아카시나무가 우거진 야산이었으나 지난 2000년 서울시 상수도사업본부에서 반포지역의 원활한 수돗물 공급을 위한 배수지 공사를 시행하면서 주민들에게 휴식공간으로 제공하기 위해 조성되었으며, 2003년 개장했다. 인근 서래마을에 프랑스인들이 많이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마을 진입로를 ‘몽마르뜨길’로 부르고 있었기 때문에 공원의 이름도 자연스레 ‘몽마르뜨공원’이 되었다. 비록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프랑스 유명 시인들의 시비를 비롯하여 옛 프랑스 몽마르뜨 언덕에서 활동하던 고흐, 고갱, 피카소의 자화상을 담은 포토존 등이 설치되어 있어 이국인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공원 한쪽에는 2010년 한·불수교 120주년을 기념하여 중앙대 류근조 교수의 시 ‘몽마르뜨 언덕’이 새겨진 시비가 세워져 있기도 하다.
여름의 상쾌한 저녁, 보리이삭에 찔리우며/ 풀밭을 밟고 오솔길을 가리라/ 꿈꾸듯 내딛는 발걸음 한 발자국마다 신선함을 느끼고/ 모자는 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날리는구나// 말도 하지 않으리, 생각도 하지 않으리/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사랑만이 솟아오르네/ 나는 어디든지 멀리 떠나가리라, 마치 방랑자처럼/ 자연과 더불어, 연인을 데리고 가는 것처럼 가슴 벅차게 –몽마르르뜨공원 랭보 시비 ‘감각’에서
서래마을은 원래 강남이라는 위치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조용하고 인적이 드물었기 때문에 프랑스인 외애도 기업가, 국회의원, 연예인들이 주로 거주해왔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이곳에 위치한 몇몇 레스토랑들이 매스컴을 타고 유명해지면서 유동인구가 늘어나자 주민에 따라서는 ‘살기에 좋지 않다’고 느끼는 경우까지 생겼다. 더구나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커피숍 같은 접객업소들도 우후죽순으로 늘어나 한때 마을 입구에서 방배중학교에 이르는 직선라인에만 12곳에 이르는 카페, 커피숍 등이 들어서기도 했다. 아예 이 구간에 ‘서래마을 카페거리’라는 공식 명칭이 붙기까지 했지만, 조용히 살고 싶어서 들어온 사람들도 많은 만큼 이 점은 상당한 부정적 요소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지만 유행처럼 번지는 다른 ‘00거리’에 비해서는 여전히 한적하고 분위기도 괜찮은 편이라 할 수 있다.
카페골목의 원조격인 ‘방배동 카페골목’은 이제 그 간판부터 바꿔달아야 할 판이다. 정작 이곳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들 스스로 “상권 구성과 안 맞는 ‘카페골목’이라는 이름부터 버리고 새롭게 태어날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형편이다. 그도 그럴 것이 450여m에 이르는 카페골목에서 몇몇 대형 브랜드 카페를 제외하고는 개성 있는 소규모 카페는 찾아보기 어렵고, 골목은 온통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술집, 식당, PC방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도 프랜차이즈 업체이기 일쑤이고. 이름만 믿고 처음 이곳을 찾은 이라면 어리둥절 한순간에 ‘촌놈’이 되기 십상이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아마데우스’ ‘제임스딘’ ‘휘가로’ ‘보디가드’ 등 유명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해 대표적인 젊음의 거리로 명성이 자자했던 카페골목은 어디로 갔는가. 방배동 카페골목은 이제 ‘카페의 추억’마저 잃어버린 채 그저 흔한 ‘먹자골목’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들 한 시절의 젊음과 함께.
어느 놈하고였더라/ 시대를 핑계로 어둠을 구실로/ 객쩍은 욕망에 꽃을 달아줬던 건 (…) 부끄럽다 두렵다 이 카페 이 자리는/ 내 간음의 목격자 –최영미 ‘슬픈 카페의 노래’ 중에서
-샛길로 : 소호들의 거리, 방배사이길
최근엔 '방배사이길'로 이름 붙여진 서초구 방배로42길이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방배사이길은 공교롭게도 서래마을 카페거리와 방배동 카페골목의 중간 사이 지역이기도 하다. 방배사이길은 두 곳과는 달리 핸드메이드, 아트 공방 등 소호들이 주를 이룬다. 300미터 남짓의 이 거리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11년 무렵 이곳에 둥지를 튼 문화예술인 10여 명이 이곳을 문화예술의 거리로 만들자는데 의기투합하여 '방배사이길 예술거리조성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운영하면서부터. 채 2년도 안되어 30여 명이 참여하는 모임으로 성장했고, 지금은 ‘방배사이길’이란 간판을 단 공식 특화거리가 되었다. 사이길에는 아이디어 넘치는 수입생활용품점을 비롯해 소파가게, 가죽공예공방, 옻칠공방, 향수공방, 목공가구제작소, 피규어제작스튜디오, 빈티지의류숍, 갤러리, 카페 등 개성 넘치는 가게들의 연속이라 어디 하나 무심코 지나칠 수가 없다. 사이길만이라도 고유의 문화를 간직한 거리로 남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여행작가 유성문은 길에서 길의 내력을 들춰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겨왔다. 그 내력과 사연은 먼빛이 되어 다시 그를 길로 내세운다. ‘길에서 길을 묻다’(경향신문), ‘사람의 길’(주간경향) 등 오랫동안 길과 사람 이야기를 써왔다. 문학관기행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를 펴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