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시인ㆍ칼럼니스트

한때 흥행의 열기가 뜨거웠던 영화 ‘건축학개론’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느 대학의 건축학개론 강의시간, 학생들은 한 명씩 나와 자신이 사는 동네에서 학교까지 오가는 길을 삐뚤빼뚤한 선으로 지도 위에 그려나간다. 강의가 끝날 무렵, 교수는 학생들에게 무심코 지나치던 동네를 천천히 걸으며 여행해 보길 주문한다.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을 찬찬히 살펴보고 관심을 가지는 것이 바로 건축학의 첫걸음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현대인들은 시간이 없다, 할 일이 너무 많다고 늘 입버릇처럼 말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서둘러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겨 다니기 바쁘다. 첨단으로 치닫는 사회의 속도감에 그저 휩쓸리다보니 ‘느리게’란 단어만 보아도 어쩐지 뒤처진다는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자신의 주변에 관심을 가질 여유를 잃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철학자 피에르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에서 ‘느림이란 재빠르지 않으며, 시간을 급하게 다루지 않는 것이다. 또한 시간에 떠밀리지 않는 것이며, 삶의 길을 가는 동안 나 자신을 잊어버리지 않고 세상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독자들에게 느림의 삶을 받아들이기 위해 한가로이 거닐어 볼 것을 권한다.
 
삶의 질 향상을 이야기하는 지금, ‘빨리 빨리’에 파묻혀 소중한 순간을 놓치기보다, 두 발로 걷고 느리게 세상을 관조하며 보이지 않던 것에 눈을 떠야 할 때라는 목소리가 차츰 높아지고 있다. 느림의 철학이 스며 있는 길 위에 서면 미처 관심을 갖지 못했던 사물과 풍경에 눈길을 주게 되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천천히 되돌아보는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처럼 느리게 걷기는 시야를 넓혀주는 것과 반대로 몰입의 힘도 지니고 있다. 장 자크 루소가 “나는 걸을 때만 생각에 잠긴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고 말했듯이 느리게 걷는 것은 사고와 의식을 뚜렷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사람이 걸을 때면 뇌에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어 두뇌가 활동하기 좋은 상태가 되고,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도 한다. 타박타박 걷다 보면 일상의 혼란스러움을 자연스레 탈피하게 된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는 혜안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몇 해 전부터 도시를 떠나 따뜻함과 여유가 어우러진 농어촌 슬로우시티(Slowcity)가 더욱 각광을 받고 있다. 슬로우시티는 공해 없는 자연 속에서 전통문화와 자연을 잘 보호하며 자유로운 옛 농경시대로 돌아가자는 의미다. 이탈리아어 치타슬로(Cittaslow)의 영어식 표현으로 느림의 삶을 추구하는 ‘유유자적한 도시, 풍요로운 마을’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1986년 패스트푸드(즉석식)에 반대해 시작된 슬로푸드(여유식)운동의 정신을 삶으로 확대한 개념으로, 느리게 걷고 느리게 생각하고 느리게 생활하자는 국제적 운동이다. 
 
슬로시티를 제대로 체험하려면 먼저 신발 끈을 느슨하게 풀어야 한다. 누구를 앞서려 하거나, 서둘러 신발 끈을 묶을 필요가 없다. 슬로시티는 말 그대로 ‘천천히’ 걸으면서 더 많은 것을 보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로시티마다 캐릭터로 등장하는 것이 바로 달팽이다. 느리기 때문에 꼼꼼하게 볼 수 있고, 느리기 때문에 마음으로는 더 풍족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슬로시티를 찾는 이유일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힐링(healing)의 열풍이 게세게 불고 있다. 빠르게 발전하고 변해가는 현실에 몸과 마음이 지친 현대인들. 공감과 위로를 얻고자 하는 바로 그들의 욕구가 이런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헝클어진 마음의 치유를 간절히 원하는 이런 흐름 속에서 특히 삶의 속도와 방향을 되짚어 보는 ‘느리게 걷기’야말로 진정한 힐링의 지름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도 이제 "빨리 달려가면 갈수록 삶이 여유로워지기는커녕 더 빨리 달리라고 채찍질 당한다."는 피에르 쌍소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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