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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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성문(먼빛)
  • 승인 2019.08.09 09:3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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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대문독립공원

아아 옥문이 열린다! 옥문이 열린다!/ 서른여섯 해 굳게 잠겼던/ 서대문감옥 육중한 문이 열린다/ 여러 선배 동무들 뒤를 따라/ 설레는 심사로 옥문을 나섰다/ 문 앞엔 한창 폭풍이 일어났다/ 아아 얼마나 보고 싶던/ 헐벗은 형제들의 얼굴들이냐/ 눈물이 솟는다/ 눈물이 솟는다/ 목이 찢어져라 맞아주는 아우성은/ 일본말이 아니로구나!/ 높이 들어 어지럽게 뒤흔드는 것은/ 일장기가 아니로구나! –김상민 ‘옥문이 열리던 날’ 중에서

굳게 닫혔던 서대문형무소의 옥문이 열리고, 옥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일시에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해방이었다. 말이 36년이지 마치 360년 같았던 악몽의 세월이 끝나고, 그날 이전의 신음은 그날의 함성이 되어 거리로 퍼져나갔다. 그날은 단지 옥에 갇혀있던 사람들만이 아니라 온 겨레가 일제의 감옥으로부터 풀려난 날이었다. 그리고 그날로부터 70년하고도 4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는 과연 일제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는가. 그날의 독립이 온전히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일제의 마지못한 항복에서 비롯한 것처럼, 그날 거리로 나선 것 역시 파옥(破獄)이 아니었으니 그저 잠시의 출옥(出獄)이었는지도 모른다. 

주로 노인층들이 찾는다는 곳인데다 ‘독립’(퀘퀘묵은?)을 주제로 한 공원이라는 점 때문에 일각에서 '서대문 탑골공원' 또는 '제2 탑골공원'이라고도 불리기도 했던 서대문독립공원이 서서히 젊은 층들도 즐겨 찾는 곳으로 바뀌는가 싶더니, 최근 들어서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같은 경우 세대불문하고(심지어 외국인들까지도) 방문객이 폭발적으로 늘어 주말이면 매표소 앞에서 줄을 서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이유야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터. 이제 서대문독립공원은 옛 서대문형무소를 중심으로 아픈 역사를 돌아보며 진정한 ‘독립’의 의미를 되새기는 산 역사교육장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서대문독립공원 3.1독립선언기념탑. 서대문독립공원은 옛 서대문형무소를 중심으로 형성된 공원이다. 원래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애국자 및 독립운동가들을 체포 수감하던 곳이었고, 해방 후에는 주로 정치 및 사회 범죄자들을 수감 감호하던 서울구치소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까지는 구치소 면회객을 제외하고는 일반인의 출입이 엄금된 곳이자 지역주민들조차 기피하던 곳이기도 했다. 1987년 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게 되면서 서울시가 부지를 매입, 1992년 지금의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장했다.
서대문독립공원 3.1독립선언기념탑. 서대문독립공원은 옛 서대문형무소를 중심으로 형성된 공원이다. 원래는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가 애국자 및 독립운동가들을 체포 수감하던 곳이었고, 해방 후에는 주로 정치 및 사회 범죄자들을 수감 감호하던 서울구치소가 있었기 때문에 당시까지는 구치소 면회객을 제외하고는 일반인의 출입이 엄금된 곳이자 지역주민들조차 기피하던 곳이기도 했다. 1987년 구치소가 경기도 의왕시로 이전하게 되면서 서울시가 부지를 매입, 1992년 지금의 ‘서대문독립공원’으로 개장했다.

서대문독립공원 둘러보기의 관문은 독립문이다. 독립문은 좀 복잡다단한 역사를 지녔다. 구한말인 1897년 세워진 독립문은 원래 중국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왜 하필 개선문이었을까?) 지어졌다. 일종의 사대주의 배격 선언인 셈이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독립문의 건립을 주도한 자가 당시 독립협회 소속의 이완용이었고, 독립문의 편액 글씨도 (논란은 있지만)그가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 연유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여기서 ‘독립’은 자기들로부터가 아니라 단지 청나라에서의 ‘독립’만으로 여겼는지 일제는 병탄 후에도 이 문을 헐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오히려 가까이에 서대문형무소의 전신인 경성감옥을 지음으로써 항간에 ‘독립을 외치면 감옥으로 끌려간다는 암시를 주기 위해 일부러 철거하지 않았을 거’라는 ‘웃픈’ 설이 돌기도 했다.

일제도 건드리지 않은 독립문에 정작 손을 댄 것은 유신 말의 구자춘 서울시장이었다. 1979년 금화터널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현저고가차도(별칭 ‘독립문고가차도’)를 놓기 위해 본래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미터 정도 그냥 통째로 들어 옮겼던 것. 이에 대해 코미디언 전유성은
일제도 건드리지 않은 독립문에 정작 손을 댄 것은 유신 말의 구자춘 서울시장이었다. 1979년 금화터널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현저고가차도(별칭 ‘독립문고가차도’)를 놓기 위해 본래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미터 정도 그냥 통째로 들어 옮겼던 것. 이에 대해 코미디언 전유성은 "차라리 고가를 돌아가게 만들었다면 관광상품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쓴소리를 내뱉기도 했다. 독립문고가차도를 철거하고 원래대로 복원하자는 주장도 있으나, 문제는 이 고가차도가 일산, 운정, 행신, 가좌, 연대앞을 비롯한 서울 서북권역과 광화문 도심을 연결하는 메인 간선도로라는 것. 일산, 운정을 기점으로 하는 대부분의 서울역행 광역버스가 독립문고가차도를 지날 정도로 중요한 도로이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복원이 어렵다는 이야기다.

우리 민족은 일제에 의한 강제점령이라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시기는 민족의 자존심을 훼손당하고, 민족 스스로의 발전이 중단되는 고통의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역사적 현실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민족 독립을 향한 투쟁의 역사가 있으며, 그로 말미암아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기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은 바로 그러한 역사의 계승을 위한 배움터로 마련되었습니다.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들은 물론, 온 국민들이 순국선열들의 뜻을 기리고, 부끄러운 지난날의 역사를 극복하기 위한 애국애족의 뜻을 배우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되고자 합니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 팸플릿에서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은 이른바 ‘근대적 행형제도’의 정비와 함께 이루어졌으니, 일제가 1906년 조선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전국 주요 8곳에 감옥부터 만드는 일이었다. 그리고 서대문 밖 금계동(지금의 현저동) 1만4,000평 대지에 100채 가까운 건물을 앉히고, 1908년 종로에 있던 경성감옥(옛 전옥서)을 옮겨왔다. 그러나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민중의 거센 저항으로 수감자의 절대수가 증가하자, 그 대책으로 1912년 마포에 다시 경성감옥을 신설하고 종래의 감옥은 ‘서대문감옥’으로 불렀다. 그리고 1923년에는 현재 남아있는 부채꼴형 벽돌감옥을 신축하면서 다시 ‘서대문형무소’로 개칭했다. 1945년 해방이 되기까지 이곳에서 숱한 독립투사들이 옥고를 치렀고, 유관순 열사 같은 경우는 모진 고문을 받다 끝내 순국하기도 했다.

지금은 역사관이 된 서대문형무소는 1906년 일제에 의해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으로, 일제강점기 독립투사와 해방 이후 군사독재시절 민주화운동가를 가두었던 악명 높은 감옥이자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살아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1987년 서울구치소의 의왕시 이전 당시, 부지 19만8,348㎡, 연건축면적 2만6,446㎡ 크기에, 수감가능인원 3,200명이었다. 지금의 역사관은 당시 건물 중 일부만을 재·보수 및 복원해놓은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구성은 출입문 바로 앞으로 보이는 전시관, 그 뒤로 중앙사, 이어서 제9~12옥사와 공작사, 한센병사, 추모비, 사형장, 시구문, 격벽장, 여옥사(유관순 지하감옥), 취사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은 역사관이 된 서대문형무소는 1906년 일제에 의해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감옥으로, 일제강점기 독립투사와 해방 이후 군사독재시절 민주화운동가를 가두었던 악명 높은 감옥이자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살아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1987년 서울구치소의 의왕시 이전 당시, 부지 19만8,348㎡, 연건축면적 2만6,446㎡ 크기에, 수감가능인원 3,200명이었다. 지금의 역사관은 당시 건물 중 일부만을 재·보수 및 복원해놓은 것이다.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의 구성은 출입문 바로 앞으로 보이는 전시관, 그 뒤로 중앙사, 이어서 제9~12옥사와 공작사, 한센병사, 추모비, 사형장, 시구문, 격벽장, 여옥사(유관순 지하감옥), 취사장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독립문을 지나 조금만 걷다보면 길게 이어진 서대문형무소의 붉은 벽돌담이 나온다. 그 담장의 중간쯤 높은 망루가 솟아있고, 아래로 난 커다란 철문을 들어서면 전시관과 마주한다. 다시 그 뒤로 돌아들면 중앙사를 기점으로 같은 모양과 크기의 붉은 벽돌건물 서너 채가 앞쪽은 모여 있고 뒤쪽은 벌어진 부채꼴 모양으로 들어앉아 있다. 중앙사로부터 연결된 모든 옥사를 한꺼번에 감시할 수 있는 이른바 파놉티콘 구조로, 한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건축형태가 아니다. 일본인 시텐노 가즈마가 설계한 서대문형무소는 건축학적 측면에서도 그리 만만하게 볼 수 없는 건축물로, 형무소에조차 공력을 기울인 데서 단순한 식민지배가 아닌 진정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노렸던 그들의 저의마저 엿보인다.

서대문형무소의 격벽장(隔璧場)은 옥사와 함께 파놉티콘 구조로 만들어진 특이한 건축물이다.  평소 수감자들이 운동을 하는 공간으로, 내부에 10개의 격벽을 부채꼴 모양으로 설치해 간수가 한 곳에서 죄수들을 감시하는 동시에 죄수들끼리 서로 정보를 교환하지 못하도록 한 시설이다. 벽 속에 갇혀있던 이들은 밖에 나와서도 또 다시 벽 속을 거닐어야 했다.
서대문형무소의 격벽장(隔璧場)은 옥사와 함께 파놉티콘 구조로 만들어진 특이한 건축물이다. 평소 수감자들이 운동을 하는 공간으로, 내부에 10개의 격벽을 부채꼴 모양으로 설치해 간수가 한 곳에서 죄수들을 감시하는 동시에 죄수들끼리 서로 정보를 교환하지 못하도록 한 시설이다. 벽 속에 갇혀있던 이들은 밖에 나와서도 또 다시 벽 속을 거닐어야 했다.

서대문형무소 둘러보기의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사형장 가는 길이다. 형무소의 가장 구석진 곳에 설치된 사형장 앞에는 무슨 상징처럼 커다란 미루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1923년 사형장 건립 당시 식재된 나무로, 사형장으로 끌려가던 애국지사들이 이 나무를 붙잡고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는 원통함을 눈물로 토해내며 통곡했다고 전해져 ‘통곡의 미루나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사형장 안에도 같은 시기 심어진 미루나무가 있었으나 억울한 한이 많이 서려서인지 잘 자라지 못하다가 끝내 고사(枯死)하고 말았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사형장 뒤편에는 ‘시구문(屍柩門)’이 있는데, 일제가 고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몰래 시체를 버리던 통로로, 일제 패망 시 폐쇄되었으나 1992년 서대문독립공원을 조성하면서 일부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사형장 가는 길을 커다란 미루나무 한 그루가 맞이한다. 1923년 사형장 건립 당시 심은 나무로, 사형장 안에도 같은 시기 심은 미루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고 한다. 미루나무는 원래 생장이 빠르고 이식이 잘되는 수종인데, 어쩐 이유인지 입구의 나무만큼 잘 자라지 못하였고, 2017년 봄, 잎이 나지 않아 최종 고사한 것이 확인되었다. 안전과 보존을 위해 지지대를 설치했으나, 그해 8월 15일 아침 9시 경 세찬 바람에 의해 쓰러지고 그루터기만 남았다.
사형장 가는 길을 커다란 미루나무 한 그루가 맞이한다. 1923년 사형장 건립 당시 심은 나무로, 사형장 안에도 같은 시기 심은 미루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고 한다. 미루나무는 원래 생장이 빠르고 이식이 잘되는 수종인데, 어쩐 이유인지 입구의 나무만큼 잘 자라지 못하였고, 2017년 봄, 잎이 나지 않아 최종 고사한 것이 확인되었다. 안전과 보존을 위해 지지대를 설치했으나, 그해 8월 15일 아침 9시 경 세찬 바람에 의해 쓰러지고 그루터기만 남았다.

2014년 2월 독립, 민주 관련 시민단체들이 서대문형무소역사관 교육장에서 서대문형무소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위한 시민모임 발족식 및 심포지엄을 개최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서대문구청에서 서대문형무소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가능성이 있는지를 알기 위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특히나 이듬해인 2015년에는 한국인 강제징용의 아픔이 담겨 있는 일본 군함도가 한국 외교부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각종 로비로 인해 결국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일본의 과거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라도 아우슈비츠처럼 서대문형무소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해야 한다는 여론이 더욱 힘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한 무리 아이들이 서대문형무소 옥사에 걸린 대형 태극기 앞을 달려 나가고 있다. 그래, 달려라. 일장기를 넘어, 욱일승천기를 넘어 진정한 독립을 이루는 그날까지.
한 무리 아이들이 서대문형무소 옥사에 걸린 대형 태극기 앞을 달려 나가고 있다. 그래, 달려라. 일장기를 넘어, 욱일승천기를 넘어 진정한 독립을 이루는 그날까지.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할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그 날이 와서 오오 그 날이 와서/ 육조 앞 넓은 길을 울며 뛰며 뒹굴어도/ 그래도 넘치는 기쁨에 가슴이 미어질 듯하거든/ 드는 칼로 이 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을 만들어 들쳐 메고는/ 여러분의 행렬에 앞장을 서오리다./ 우렁찬 그 소리를 한 번이라도 듣기만 하면/ 그 자리에 거꾸러져도 눈을 감겠소이다. -심훈 ‘그날이 오면’ 전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에서는 8월 14~15일 우리나라의 독립을 기뻐하고 자유와 평화, 민주의 가치를 미래세대와 함께 나누는 시민역사·문화축제 ‘서대문독립민주축제 2019’가 열린다. ‘독립·민주지사 풋프린팅’ ‘역사콘서트-1919 그때 우리는!’ 등 다양한 행사와 함께 안숙선, 김덕수, 앙상블시나위, 거미 등이 참가하는 축하공연(14일 저녁 7시30분부터)도 펼쳐진다. 무료관람이며, 이 기간 야간개장(밤 9시까지)도 한다. 

-샛길로 : 국사당과 선바위
서대문형무소 맞은편으로는 인왕산의 정기가 뚜렷하다. 그 마루터기 부근에 국사당(國師堂)이 있다. 국사당은 최영장군·무학대사·이태조를 비롯한 여러 무신상을 모신 신당으로, 본디 남산 꼭대기(지금은 팔각정이 위치)에 지어진 건물이었다. 그러나 1925년 일본인들이 남산 기슭에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으면서 국사당이 자기들 신사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이전을 강요하면서 결국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이전 장소를 인왕산 기슭으로 택한 것은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가 이곳에서 기도하던 자리라고 전해지기 때문.
그리고 국사당보다 조금 더 올라서면 선바위다. 마치 중이 장삼을 입고 참선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 이름 붙여진 선바위는 높이 7~8m, 가로 11m 내외, 앞뒤의 폭이 3m쯤 되는 바위다. 두 바위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형상으로, 옛날 사진에는 주변에 아무런 시설물 없이 바위만 우뚝한 모습인데 지금은 바위 아래 시멘트로 된 제단이 설치되어 그 앞이 답답하다. 선바위를 비롯한 인왕산 거석들의 위용은 신성한 기운으로 주변을 압도한다. 바로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지금도 치성을 드리기 위한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선바위 일대에 서면 서대문형무소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서대문형무소가 무수한 사람들을 가두었던 시절, 그들을 면회하기 위해 서대문형무소를 찾았던 가족들의 발걸음이 이리로까지 이어졌을 법하다. 과거 일제의 압제에 시달리던 독립운동가들이 갇혔던 서대문형무소와, 일제의 압박에 밀려 옮긴 국사당의 묘한 조화는 강한 인상과 여운을 남긴다. 아무리 내몰리고 가두어진다 해도, 그럴수록 빛을 바라는 사람들의 바람은 더욱 간절해진다. 내일모레면 빛을 되찾는, 되찾아야 하는 광복절이다.

선바위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인근에서 ‘선바위길’이라는 이정표를 따라 올라가면 고층 아파트가 길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아파트 외곽으로 연결된 언덕길을 오르다가 어린이집을 오른쪽으로 끼고 나아가면 무악공원이고, 멀리 인왕산 성벽과 그 왼쪽으로 특이한 형태의 바위가 보인다. 어렵싸리 선바위로 오르는 길에 아까부터 남산 쪽에서 꾸역꾸역 몰려들던 먹구름이 이윽고 한바탕 장대비를 쏟아붓는다. 그것이 오랫동안 참아왔던 어떤 원망을 씻어내는 해원(解寃)의 비였으면 좋으련만.
선바위를 찾아가는 길은 쉽지 않다.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 인근에서 ‘선바위길’이라는 이정표를 따라 올라가면 고층 아파트가 길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개의치 않고 아파트 외곽으로 연결된 언덕길을 오르다가 어린이집을 오른쪽으로 끼고 나아가면 무악공원이고, 멀리 인왕산 성벽과 그 왼쪽으로 특이한 형태의 바위가 보인다. 어렵싸리 선바위로 오르는 길에 아까부터 남산 쪽에서 꾸역꾸역 몰려들던 먹구름이 이윽고 한바탕 장대비를 쏟아붓는다. 그것이 오랫동안 참아왔던 어떤 원망을 씻어내는 해원(解寃)의 비였으면 좋으련만.

여행작가 유성문은 길에서 길의 내력을 들춰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겨왔다. 그 내력과 사연은 먼빛이 되어 다시 그를 길로 내세운다. ‘길에서 길을 묻다’(경향신문), ‘사람의 길’(주간경향) 등 오랫동안 길과 사람 이야기를 써왔다. 문학관기행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를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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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강지서(위영) 2019-09-10 08:45:34
서울시에서 서대문 형무소 뒷편에 잇는 안산에 2-4시간 걸을 수 있는 둘레길을 아주 많이 만들어 놓아 명소가 되었다. 나이드신 분이나 가족단위로 산책하는 사람을 많이 본다. 안산 오면서 독립역사관도 둘러 보게 되어 금상첨화다.

역사의 교훈을 배우지 못하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처럼 아무리 아픈 역사를 가졌어도 여기서 교훈을 얻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일제가 저리른 만행을 기억하는 산 역사의 교육장으로서 서대문 형소문소도 길이 보전할 장소이다. 이런 의미를 잘 파악한 유성문 작가에게 감사하다.

이혜숙 2019-08-09 23:43:45
서대문 독립공원 보다 서대문 형무소라는 이름이
익숙한 이곳은 초등학생 딸에게 독립 운동가들이
겪었을 고초를 알려 주기 위해 가 본 교육장소였다.
공원에 대한 지식은 팜플랫에 쓰여진 내용이 전부
였는데 로드서울을 읽으며 공원과 주변에 얽힌
사연이 깊은줄 알고 나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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