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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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휴가 중이던 지난 9일 ‘손기정 기념관’을 찾았다. 83년 전인 1936년의 그날은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우승, 월계관을 썼던 뜻 깊은 날이었다. 그리고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로부터 56년 뒤인 1992년 8월 9일 같은 날, 황영조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의 월계관을 썼다. 나는 그날을 특별히 기억하고 싶은 충동을 가누며 가슴 뛰는 역사의 현장을 간접 체험이라도 할 요량으로 기념관을 찾아 나섰다.
 
1호선 시청역에서 지하철 2호선으로 환승한 뒤 충정로역에서 하차, 허름한 골목길을 따라 쭉 올라가니, 아파트와 다세대 주택에 둘러싸인 만리동 언덕바지에서 ‘손기정 체육공원’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넓이 2만 9682㎡. 민족교육의 산실이었던 손기정의 모교 양정고(養正高)가 있던 자리로 학교가 1988년 목동(木洞)으로 이전할 때에 맞춰 체육공원으로 재탄생한 곳이다. 바로 그 공원 안에 지난해 문을 연 손기정 기념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기념관에는 나라를 잃은 어려운 시절, 세계를 제패해 우리 민족의 긍지를 높여준 손기정의 삶이 잘 간추려져 있었다. 가난해서 달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던 소년이 배고픔을 잊기 위해 압록강 철교 위를 달렸던 시절, 나라를 빼앗겨 올림픽 첫 우승의 기쁨마저 누릴 수 없었던 젊은 날의 우울, 1988년 서울 올림픽 성화 주자로 나섰을 때의 가슴 벅찼던 감동, 그리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몬주익 신화’의 주인공 황영조와 함께했던 감격적 노년기의 이야기가 잘 정리돼 있었다.
 
한국인으로 사상 첫 올림픽 우승을 하고도 마치 패잔병처럼 고개를 떨군 채 침울한 표정을  짓는 손기정의 그 무렵 사진은, 그 어떤 수식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역사 교육의 살아 있는 자료였다. 특히 손기정이 베를린에서 한국의 지인에게 보낸 엽서 속의 ‘슬푸다’라는 단 세 글자는 당시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기념관을 둘러보는 내내 손기정이 42.195km를 어떤 마음가짐으로 뛰었는지도 뚜렷이 와 닿았다. 특히 결승 테이프를 끊는 순간, 일본과 독일 아나운서의 흥분한 목소리를 생생한 녹음으로 다시 들을 수 있어 마치 내가 83년 전 베를린 스타디움의 뜨거운 열기 속에 빠진 듯한 착각이 일 정도였다.
 
관람을 마친 뒤 공원을 되돌아 나오며 손기정이 히틀러로부터 받아 왔다는 대왕참나무 앞을 지날 때까지 관람 내내 가슴을 파고들었던 영광과 아픔의 여운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잠시 벤치에 앉아 눈을 지그시 감으니 다시금 일본과 독일 아나운서의 흥분한 목소리가 나의 귓전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타임머신을 타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83년 전의 그날로 되돌아가 손기정이 이룩한 역사적 장면과 이미 만나고 있었다. 
 
1936년 8월 9일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 운집한 12만 명의 관중들은 곧이어 스타디움으로 들어올 마라톤 우승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림픽의 마지막 공식 경기이며, 그야말로 올림픽의 꽃이라고 할 마라톤 우승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지대했다. 
 
독일 국민들을 선동, 광적인 나치즘으로 몰고 가던 히틀러는 ‘아리아 인종’이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장면을 독일 국민들이 직접 목격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인종주의적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결승점인 올림픽 스타디움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아리아인이 아니었다. 
 
스타디움 안으로 접어든 손기정은 마지막 한 바퀴를 채우기 위해 투혼을 불사르며 트랙을 돌았다. 관중들은 그의 마지막 질주를 숨죽여 지켜보았다. 전력을 다해 뛰어가는 동양에서 온 작고 다부진 마라토너. 그의 얼굴엔 표정이 거의 없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고 담담하고 묵묵하게 결승선을 통과했다. 2시간 29분 19초 2. 신기록이었다. 당시로서는 인간이 넘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마(魔)의 2시간 30분대를 넘어선 것이다.
 
시상대 가장 윗자리에는 24세의 조선 청년 손기정이 서 있었다. 한국인이 따낸 첫 올림픽 금메달이었지만 식장에는 태극기 대신 일장기가 올라갔다. 그리고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가 울려 퍼졌다. 손기정은 시상식에서 독일 총통 히틀러로부터 우승 기념 묘목을 받았다. 시상식이 끝나고 난 뒤 3위로 동메달을 목에 건 남승룡이 가슴 뭉클한 한 마디를 남겼다. 
 
“나는 손기정이 1등을 한 것보다 그가 가슴의 일장기를 가릴 수 있는 묘목을 갖고 있다는 게 더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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