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동철길과 푸른수목원

새로 이사 간 동네는 내 마음에 들었다. 고향마을처럼 좁은 길들이 많았다. 깨끗하지는 않았지만 곧게 뻗은 길들이었다. (…) 벽돌건물은 비실비실한 가로수가 있는 대로변에 있었다. 내가 살 집은 2층에 있었는데 아래층은 냉면집이었다. 이름이 안소영이라는 주인아줌마는 그게 큰 장점인 것처럼 이야기했다.
“저녁때고 언제고, 아무 때나 내려가서 내 이름을 대면 먹을 것을 줄 거야. 값도 아주 싸.”
-르 클레지오 <빛나-서울 하늘 아래> 중에서

그 동네는 오류동이다. 서울의 가장자리 구로구에 있는. 그리고 그녀의 고향은 이 땅의 끄트머리 어디쯤 전라도 어촌마을이다. 그 열아홉 살 ‘빛나’를 ‘서울 하늘 아래’로 보낸 이는 프랑스의 작가 르 클레지오다. 200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클레지오는 공교롭게도 2007년 가을에서 2008년 가을까지를 서울에서 보낸다. 이화여대 초빙교수로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기 위해서였다. 2001년 첫 방문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한국을 오가면서 한국과 서울을 사랑했던 작가는 언젠가 서울을 무대로 한 작품을 쓰겠노라 약속했고, 그 약속은 2017년 발표한 소설 <빛나-서울 하늘 아래>로 지켜졌다.

오류동역에서. 하늘엔 비행기가 떠가고, 땅위론 열차가 달린다. 오류동에서 유독 빛나는 건 하늘이고, 그 하늘을 그처럼 빛나도록 하는 햇빛이다.
오류동역에서. 하늘엔 비행기가 떠가고, 땅위론 열차가 달린다. 오류동에서 유독 빛나는 건 하늘이고, 그 하늘을 그처럼 빛나도록 하는 햇빛이다.

오류동에 도착해서는 계단을 내려가 철길 밑을 지나야 했다. 나는 사방의 대로가 모이는 이 넓은 교차로와, 여기저기 볼트로 조인 자국이 있는 철교가 참 좋았다. 마치 미국 어딘가를 여행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오류동의 다리를 닮았을 브루클린 다리를 상상했고, 오류동의 넓고 좁은 길들과 비슷하게 생겼을 뉴욕 브롱크스나 퀸스 등의 서민구역을 상상했다.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전라도 어촌 출신의 열아홉 살 소녀 ‘빛나’는 거대도시 서울이 낯설고 복잡하고, 그래서 외롭다. 그리고 그녀가 힘겹게 바라보는 세상은 작가의 시선과 끊임없이 교차한다. 홀로 상경한 빛나는 그녀를 ‘촌년’이라고 멸시하던 고모의 집과, 쥐 소굴 같았던 이대 앞 자취방을 거쳐 낯선 마을 오류동으로 옮겨간다. 빛나는 오류동에서 뜻밖에도 고향마을 같은 안도감을 느낀다. 그것은 소박한 골목길들과 아직까지 남아있는 사람들 간 정 때문이었으리라. 장마가 끝나고, 그래서 더 화사한 햇빛이 쏟아져 내리던 여름날, 오류동을 찾은 내가 바라본 풍경 역시 그러했다. 

오류동의 산동네는 가파르지만 단정하고, 넓고 좁은 골목길들은 복잡하기보다는 속내가 깊어 보였다.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뒷동산이 있던 그 마을처럼.
오류동의 산동네는 가파르지만 단정하고, 넓고 좁은 골목길들은 복잡하기보다는 속내가 깊어 보였다.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뒷동산이 있던 그 마을처럼.

오동나무와 버드나무가 많아 ‘오류골’이라고 불렸던 오류동은 북쪽과 동쪽으로 개봉동, 남쪽으로 천왕동, 서쪽으로 항동과 온수동 등에 둘러싸여 이들의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옛 오류골 주막거리는 개항 이후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나그네들이 쉬어가던 곳으로, 지금 비록 건물은 없어졌지만 예전 객사가 있던 곳임을 알리는 비석이 남아있다. 1975년 이전까지만 해도 이 일대는 ‘오류골 참외’ 생산지였다. 오류골 참외는 옛날 궁중에 진상하던 과일로, 소사의 복숭아, 시흥의 수박, 성환의 배와 함께 가장 인기 있는 과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제 참외는 물론이고, 50년 전통의 오류시장마저 개발에 밀려 자칫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기도 하다.

1968년 개장한 오류시장은 한때 점포 수가 250여 곳에 달했으나 1990년대부터 쇠퇴일로를 걷기 시작, 현재 3분의 2 이상의 점포가 문을 닫은 상태다. 그마저도 존치 여부를 두고 구로구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형편이다. ‘시장 폐쇄 반대’ 현수막이 덕지덕지 나붙은 낡고 어두운 시장통을 걷는 노인들의 발걸음이 시름겹다.
1968년 개장한 오류시장은 한때 점포 수가 250여 곳에 달했으나 1990년대부터 쇠퇴일로를 걷기 시작, 현재 3분의 2 이상의 점포가 문을 닫은 상태다. 그마저도 존치 여부를 두고 구로구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형편이다. ‘시장 폐쇄 반대’ 현수막이 덕지덕지 나붙은 낡고 어두운 시장통을 걷는 노인들의 발걸음이 시름겹다.

세월의 흐름은 그처럼 무상하기만 한 것일까. 항동으로 가자. 거기 고즈넉한 철로라도 거닐며 시간을 거슬러 아름다웠던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는지 물어라도 보자. 오류동에서 시흥 가는 길을 따라가다 잠시 아파트 옆 샛길로 들어서면 생각지도 못한 풍경이 펼쳐진다. 마치 시간과 단절이라도 하듯 양 옆으로 키 큰 나무들이 담장처럼 우거지고, 그 한가운데를 곧게 뻗은 철로가 길게 이어진다. 그 철길을 따라가다 보면 문득 추억의 어느 시절로 되돌아갈 것만 같다. 거기 아스라한 철길을 열아홉 살의 빛나가 걷고 있다. 레일 위 아슬아슬 발을 옮기는 남자친구의 손을 꼭 잡고서. 그 길의 끝은 또 어디일까. 

‘항동철길’은 서울 오류동과 부천 옥길동을 잇는 약 7km 거리의 단선 철로로, 1959년 처음 조성된 이래 그동안 군용 화물철도로 이용되어온 오류선의 일부 구간이다. 2016년 9월 항동공공주택지구 개발사업이 시작되면서 사업이 마무리될 때까지 열차운행을 잠정 중단키로 했는데, 이 때문에 한적해진 철길이 사진촬영에 좋은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면서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들자 사업이 끝난 지금에도 운행재개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항동철길’은 서울 오류동과 부천 옥길동을 잇는 약 7km 거리의 단선 철로로, 1959년 처음 조성된 이래 그동안 군용 화물철도로 이용되어온 오류선의 일부 구간이다. 2016년 9월 항동공공주택지구 개발사업이 시작되면서 사업이 마무리될 때까지 열차운행을 잠정 중단키로 했는데, 이 때문에 한적해진 철길이 사진촬영에 좋은 핫플레이스로 떠오르면서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들자 사업이 끝난 지금에도 운행재개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철길이 끝나갈 무렵 ‘항동철길역’이 나온다. 비록 실제가 아닌 조형물일 뿐이지만, 사람들은 그 간이역에서 잠시 마음을 내려놓는다. 생각해보면 꼭 어디론가 가야 할 필요도 없다. 삶은 이미 어디로든 흘러가고 있으니. 열아홉 살의 빛나는 우연히 불치병을 앓고 있는 여인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집안에 갇힌 채 죽음을 기다리는 살로메는 빛나와 함께 그 이야기 속으로 상상여행을 떠난다. 그 이야기 속의 장소들은 작가가 서울 곳곳에서 만난 풍경들이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들려준 이야기들은 빛나를 통해 살로메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고스란히 우리들의 이야기가 된다.

잘 들어봐요, 바람이 바다에서 불어와요. 부드러운 아침 바람이에요. 얼굴에 바람을 느껴봐요, 살로메. 당신은 하늘 높이, 북쪽을 향해, 저쪽 세상의 강기슭을 향해 날아가고 있어요. 흑룡과 다이아몬드, 그리고 다른 비둘기들과 함께하는 당신의 마지막 여행이에요. 바람은 당신을 취하게 하고, 당신 눈을 멀게 하고, 당신 숨을 가쁘게 하지요. 하지만 당신은 계속 날고 있어요. 여행이 끝날 때까지 똑바로 날아갈 거예요. 두 팔을 벌리고 온몸으로 바람을 느껴봐요. 당신은 이제 하나도 무겁지 않아요. 바람에 흩날리는 새털처럼, 나뭇잎처럼, 꽃잎처럼 가벼워요.

‘항동철길역’은 구로문화재단이 지역주민 모임인 '구로항아리', 예술감독 이민하와 함께 제작한 간이역 조형물이다. 현판과 이정표 등이 설치되어 있고, 옆에서는 토끼 역장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여행객들을 맞는다. 여기서 개성까지는 80km 거리고, 빛나의 고향일지도 모를 땅끝 해남까지는 325km다.
‘항동철길역’은 구로문화재단이 지역주민 모임인 '구로항아리', 예술감독 이민하와 함께 제작한 간이역 조형물이다. 현판과 이정표 등이 설치되어 있고, 옆에서는 토끼 역장이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여행객들을 맞는다. 여기서 개성까지는 80km 거리고, 빛나의 고향일지도 모를 땅끝 해남까지는 325km다.

항동철길의 끝자락에는 푸른수목원이 있다. 서울시에서 최초로 조성한 시립 수목원으로, 지난 2013년 개장했다. 약 10만㎡의 넓은 부지 안에 24개의 테마정원으로 조화롭게 구성되어 있으며, 기존 항동저수지와 어울려 교육프로그램과 친환경관리 중심으로 운영되는 ‘생태의 섬(Eco-Island)’이다. 수목원 곳곳에는 무성한 생명들이 한여름 더위를 이겨내고 서서히 가을로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살로메를 보내고 다시 혼자가 된 빛나는 마침내 스무 살 홀로서기에 나선다. 스무 살 빛나에게 작가가 진정 들려주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절망과 슬픔을 통해 생은 더욱 빛난다는 위로와 용기였을까.

한여름 푸른수목원. 무성한 여름잎들은 지고 또 져서 습지의 푸름에 푸름을 더한다.
한여름 푸른수목원. 무성한 여름잎들은 지고 또 져서 습지의 푸름에 푸름을 더한다.

나는 서울의 하늘 밑을 걷는다. 구름은 천천히 흐른다. 강남에는 비가 내리고, 인천 쪽에는 태양이 빛난다. 비를 뚫고 북한산이 북쪽에서 거인처럼 떠오른다. 이 도시에서 나는 혼자다. 내 삶은 이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제 가을도 멀지않았다.

너무 늦은 것일까, 아니면 너무 이른 것일까. 오리 한 마리, 한여름 항동저수지의 빼곡한 수초 사이로 길을 내며 나아가고 있다. 이내 사라져버릴.
너무 늦은 것일까, 아니면 너무 이른 것일까. 오리 한 마리, 한여름 항동저수지의 빼곡한 수초 사이로 길을 내며 나아가고 있다. 이내 사라져버릴.

여행작가 유성문은 길에서 길의 내력을 들춰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새겨왔다. 그 내력과 사연은 먼빛이 되어 다시 그를 길로 내세운다. ‘길에서 길을 묻다’(경향신문), ‘사람의 길’(주간경향) 등 오랫동안 길과 사람 이야기를 써왔다. 문학관기행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를 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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