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ㆍ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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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업무차 세종로에 있는 K문고를 자주 찾는다. 국내 최대 규모인 그 서점 인근에는 광화문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서울시가 600여 년 역사를 지닌 중심거리 세종로를 차량 중심에서 인간 중심의 공간으로 전환하기 위해 2009년 8월 시민에게 개방했다. 이 광장은 경복궁과 북악산 등 아름다운 조망 공간으로 조성된 것이 특징인데, '광화문의 역사를 회복하는 광장'으로서의 의미가 크다. 
 
이곳에서 2009년 설치된 세종대왕 동상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그 너머로 듬직한 광화문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은 1395년 창건되어 정도전(鄭道傳)에 의해 사정문(四正門)이라 이름 지어졌다. 오문(午門)으로 불리기도 하던 중 집현전 학사들이 ‘광화문(光化門)’이라고 바꾸었다. 이는 '빛이 사방을 덮고 교화가 만방에 미친다.'는 뜻의 ‘서경(書經)’ 구절 '광피사표 화급만방(光被四表 化及萬方)'에서 차용해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270여 년 동안 재건되지 못하다 고종 때에 이르러 왕실의 존엄성을 과시하고자 경복궁을 다시 지으며 광화문도 함께 복원했다. 한일강제병합 뒤 조선총독부는 광화문을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으로 이전시켰고, 그 뒤 6·25전쟁으로 다시 소실된 것을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시켰다. 
 
지금의 광화문은 2006년부터 복원 및 이전 공사가 시작되어 2010년 8월에 완료된 것이다. 이처럼 광화문은 험난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부침을 거듭하며 영욕을 고스란히 안은 시련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광화문을 철거하려 하자, 1922년 요미우리 신문에 ‘사라질 위기에 놓인 한 조선의 건축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논설을 발표, 해체를 막아낸 일본 민예운동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일화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해 8월 동아일보에 ‘아! 광화문이여’라는 제목으로 번역, 연재된 그의 글은 광화문의 예술적 가치를 이 땅에서 새삼 각성케 하는 큰 계기가 되었다.
 
일본 공예운동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는, 그 무렵 조선의 공예를 조선인 못지않게 사랑했다. 27세 때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 등을 답사하고 서울 아현동에서 조선백자와 공예품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뒤로 21차례나 현해탄을 건넜다.
 
1924년에는 “조선 물품은 조선에 있어야 한다”며 경복궁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했다. ‘민예(民藝)’라는 말을 창시한 주인공도 그였다. 72세에 세상을 뜬 그는 20여년 뒤인 1984년 한국정부가 외국인에게 처음 주는 보관문화훈장을 받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우리 사회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던 그의 논설, ‘아! 광화문이여’를 다시 접하며 광화문의 역사적 의미를 깊이 되새겨 본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그대의 명이 이제 단석(旦夕)에 이르렀구나. 잔혹한 끌과 망치가 그대의 몸을 조금씩 무너뜨리기 시작할 날이 머지않았다. 그러나 아무도 그대를 도와 줄 수 없구나. 누구나 망설이며 조심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말을 못하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이 한 편의 글을 쓰는 것이다. 
 
적어도 한 사람이 그대의 죽음을 생각하여 눈물짓고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다오. (중략) 아아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웅대하도다 그대의 모습. 우러러보는 자 그 누구라도 의젓한 그 위엄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것은 한 나라의 왕궁을 지키는 데 정문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자세이다. 참으로 한 왕조의 위엄을 보이기 위하여 세운 훌륭한 기념비이다. (중략) 정치는 예술에 대해서까지 몰염치해서는 안 된다. 예술을 침해하는 그런 힘은 삼가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술을 옹호하는 것이 위대한 정치가 해야 할 행위가 아니겠는가. 우방을 위하여, 예술을 위하여, 역사를 위하여, 도시를 위하여 그중에서도 특히 그 민족을 위하여, 저 경복궁을 살려 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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